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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royal family history29

잉글랜드 왕 스티븐(King Stephen) 1편: 14년간의 무정부시대 1135년 헨리 1세(Henry I)가 서거한 뒤, 그의 조카 스티븐 블루아(Stephen of Blois)와 딸 엠프레스 마틸다(Empress Matilda)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헨리 1세가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귀족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티븐은 형이자 윈체스터 주교(Bishop of Winchester)인 앙리 블루아(Henry of Blois)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계승 경쟁에 뛰어들었으며, 잉글랜드(England) 교회와 궁정 유력 인사들의 지지를 확보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정통 후계자라고 믿은 마틸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스티븐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이어갔습니다 1097년, 스티.. 2025. 8. 14.
헨리 1세(Henry I) 3편, 노르만 왕조의 최후 그리고 플랜태저넷 왕조의 서막 잉글랜드 왕 헨리 1세(Henry I of England)와 스코틀랜드 말콤 3세(King Malcom III of Scotland)의 딸 마틸다(Matilda of Scotland)와의 결혼 이야기에 이어, 헨리 1세의 정치적 주요 업적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100년, 윌리엄 2세(William II)과 죽고 새로운 잉글랜드 왕위 오르던 헨리 1세(Henry I)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며, 개혁과 평화, 안보를 강조했으며, 왕실 행정의 현대화를 통해 그는 더욱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였으며, 새로운 토지와 기회를 많은 귀족들에게 제공하였습니다. 특히 왕실 사법 제도를 크게 변화시키기도 했으나 실상은 억압에 기반한 질서를 내세우다 보니 ‘정의의 사자(Lion of .. 2025. 8. 13.
헨리 1세(Henry I) 2편, 수 많은 정부(Mistress)를 둔 잉글랜드 왕 헨리 1세(King Henry I of England)의 형 로버트 커터스(Robert Curthose)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전과 후의 상황을 알아봐야겠습니다.형의 죽음으로부터 단 4일 만인 1100년 8월 5일, 그는 웨스트민스터 수도원(Westminster Abbey)에서 왕으로 즉위 하였고, 그는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즉시 대관 헌장(Coronation Charter)을 발표하며 교회 정책을 개혁하고, 귀족들의 재산권을 존중할 것임을 약속하였습니다. 헨리 1세는 왕에 즉위 하자마자, 앵글로색슨(Anglo-Saxon) 왕가의 혈통을 지닌 마틸다(Matilda)에게 청혼하였는데, 이는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다보니 노르만 왕조가 앵글로색슨의 뿌리를 대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 2025. 8. 12.
헨리 1세(Henry I) 1편, 다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통일한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다음으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1세(King Henry I of England)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헨리는 1068년 9월, 요크셔(Yorkshire)의 셀비(Selby)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노르망디의 공작이자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왕위에 오른 윌리엄 1세(William I)이며, 어머니는 플랑드르(Flanders) 백작의 딸이자 프랑스의 국왕 앙리 1세(Henry I of France)의 조카인 마틸다(Matilda of Flanders)였습니다. 마틸다는 1068년 5월 11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Westminster Abbey)에서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윌리엄 1세가 1087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윌리엄 2세.. 2025. 8. 6.
윌리엄 2세(William II) 2편, 왕의 죽음은 우연인가 음모인가 feat. 헨리 1세 두 번의 반란을 저지한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King William II of England)의 처절한 응징과 그의 원인 모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윌리엄 2세(William II)는 1095년에 일어난 노섬벌랜드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Robert de Mowbray)의 반란을 강경하게 진압한 뒤, 그의 지위와 신분을 고려하되 냉혹하고도 상징적인 방식으로 응징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윌리엄 2세는 로버트를 즉각 처형하지는 않고 귀족 사회 전체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로버트의 작위와 방대한 영지를 모두 몰수하였습니다. 이어 그는 로버트를 수도원에 감금시켜 평생 동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처분은 단순한 사형보다도 더욱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형벌로, 반역에 대한 .. 2025. 8. 4.
윌리엄 2세(William II) 1편, 왕이 되자마자 반란 두 번을 겪은 윌리엄 2세의 불안한 왕좌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King William I of England) 죽음 후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은 그의 셋째 아들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는 붉은 얼굴빛으로 인해 ‘루퍼스(Rufus, 붉은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아버지 윌리엄 1세가 가장 아꼈던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봉건적 관습에 따라 아버지는 장남 로버트 커터스(Robert Curthose)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주어야 했으나 반란에 가담한 장남보단 본인에게 충성심이 높았던 셋째 윌리엄 루퍼스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로버트 커터스는 왕 윌리엄 1세의 고향인 노르망디(Normandy) 공국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노르만(Norm.. 2025. 8. 1.
윌리엄 1세(William I) 4편, 6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의 시대를 연 윌리엄 1세의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윌리엄 1세는 생애의 마지막 15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노르망디(Normandy)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어떤 해에는 잉글랜드에 전혀 오지 않을 만큼 장기간 프랑스에 머무르기도 했으며, 그동안 잉글랜드의 통치는 신뢰할 만한 교회의 인물들에게 위임했습니다. 특히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랭프랑크(Lanfranc)를 깊이 신뢰하며 그에게 나라의 안정과 질서를 맡기며 잉글랜드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1066년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노르망디의 국경 방어에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잉글랜드의 왕이 아닌, 여전히 프랑스 내 노르망디 공작령의 통치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대륙의 위협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습니.. 2025. 7. 25.
윌리엄 1세(William I) 3편, 이중 통치 전략과 피로 세운 잉글랜드의 질서 노르망디(Normandy)로부터 달려와 잉글랜드(England)를 정복해 왕위에 오른 윌리엄(William I)에게는 끊임없는 반란과 반란이 이어졌는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1편과 2편에 전한 것과 같이 윌리엄은 이미 전투와 정치 모두에 능숙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노르망디(Normandy)에서 충성심이 부족한 귀족들과 공직자들을 자신의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로 교체하고, 봉신 간의 사적인 전쟁을 억제했으며, 공작으로서의 권한을 되찾고 봉건 질서를 정비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노르망디 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윌리엄은 그 체제를 잉글랜드(England)의 전통에 맞게 조정하려 했습니다. 윌리엄이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에서 각각 다르게 통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정치적 상황과 윌리엄의 입장이 달랐기.. 2025. 7. 24.
윌리엄 1세(William I) 2편,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다 귀족들의 반란과 위협 속에서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의 시대를 연 윌리엄의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1054년부터 1060년까지 윌리엄(William)은 내부 귀족들의 반란과 프랑스 왕 앙리 1세(Henri I of France), 앙주의 조프루아 마르텔(Geoffrey Martel of Anjou)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동맹이라는 복합적인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만약 노르망디(Normandy) 반란군이 프랑스 왕과 앙주 백작과 3 연대로 연합하여 공격했다면 윌리엄은 아마 몰락했을지도 모르지만, 앙리 1세와 조프르아 마르텔이 지원한 반란 귀족세력과의 이해관계가 충돌이 나고 무너지며 윌리엄에게 더욱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05.. 2025. 7. 23.
윌리엄 1세(William I) 1편, 노르만 왕조의 서막을 연 잉글랜드의 왕의 탄생 잉글랜드를 4번째로 통일시킨 왕, 노르만 왕조의 시조 윌리엄 1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028년, 윌리엄(William)은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1세(Robert I of Normandy)와 그의 첩 에를레바(Herleva, 혹은 아를레트(Arlette)라고도 불리며, 팔레즈(Falaise) 출신의 무두장이 혹은 장의사의 딸)의 두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윌리엄이 태어난 이후 에를레바는 로버트 1세의 첩의 신분이여서 신분 상승과 명예 회복을 위해 콩트빌(Conteville)의 비스카운트였던 에를랭(Herluin)과 결혼하였으며, 이들 사이에서 두 아들(그 중에는 훗날 바유(Bayeux)의 주교가 되는 오도 드 바유(Odo de Bayeux)와 로버트 드 모르탕(Robert de Mor.. 2025. 7. 22.
잉글랜드의 최초 외래군주, 바이킹 크누트(Cnut) 마침내 덴마크 바이킹에게 빼앗긴 잉글랜드의 흑역사의 주인공, 바이킹 크누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크누트(Cnut)는 덴마크 왕 스베인 포크비어드(Sweyn Forkbeard)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1013년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일시적으로 런던을 함락하고 애설레드 2세(Aethelred II)를 노르망디로 몰아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베인이 이듬해 사망하자, 잉글랜드 귀족들은 애설레드를 복위시켰고, 크누트는 덴마크로 철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곧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다시 침공을 감행하며, 잉글랜드 왕위 탈환을 본격적으로 시도합니다. 1016년, 애설레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에드먼드 아이론사이드(Edmund Ironside)가 즉위하면서 크누트와의 전면전이 벌어졌습니다. 양측은 여러 차.. 2025. 7. 15.
잉글랜드 통일 후 외래에 빼앗긴 웨식스 왕조의 후예 애설스탠(Athelstan)의 이복동생 에드먼드(Edmund)와 이드레드(Edred) 중 애설스탠이 사망 후 에드먼드 1세(Edmund I)가 왕위에 오르자 내부 반란에 의해 암살 당하고 왕위에 오른 동생 이드레드(Edred)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알프레드 대왕부터 애설레드 2세까지 즉 웨식스 왕조가 바이킹에게 빼앗긴 잉글랜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이드레드(Edred)는 에드워드 장로왕(Edward the Elder)과 켄트의 에드기프(Eadgifu of Kent)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형 애설스탠(Athelstan)과 에드먼드 1세(Edmund I)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위장 질환으로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병을 앓았다고 전해집니.. 2025. 7. 14.
최초로 잉글랜드을 통일시킨 왕, 애설스탠(Athelstan) 알프레드 대왕에 이어 잉글랜드를 처음으로 통일시킨 애설스탠의 삶을 알아보겠습니다. 애설스탠(Athelstan, 또는 애셀스탠 Aethelstan)은 에드워드 왕(Eadward the Elder)의 아들이자,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의 손자(Grandson)입니다. 그는 에드워드의 첫 번째 아내 엑그윈(Ecgwynn) 사이에서 서기 894년경 태어났습니다. 에드워드가 924년에 사망하자, 그의 또 다른 아들인 이복형제 엘프워드(Aelfweard)가 곧바로 왕위를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에는 웨식스(Wessex) 세력이 지지를 보냈으며, 반면 머시아(Mercia)는 애설스탠을 지지했습니다. 엘프워드는 에드워드의 사망 후 단 3주 만에 애설스탠을 위해서(?) 또는 시기 상 알맞게 사망하.. 2025. 7. 11.
잉글랜드가 통일되기 전 앵글로색슨 7왕국이 아닌 9왕국? 지금까지 플랫태저넷 왕조의 시작이였던 헨리 2세부터 헨리 3세의 시대까지 주요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헨리 3세 이후 그리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잉글랜드 왕의 시초부터 플랫태저넷 왕조의 창시된 배경을 먼저 알아보고자 합니다. 410년경, 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철수하면서 브리튼(Britain) 섬(현재 영국)은 수백 년간 유지되던 정치·군사적 질서를 잃게 되었습니다. 로마 군대가 떠난 자리는 곧 혼란과 무정부 상태로 이어졌으며, 이 시기를 틈타 외부 민족들의 침입과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세력은 바로 앵글족(Angles), 색슨족(Saxons), 주트족(Jutes)과 같은 게르만계 부족들이었습니다.✋잠깐!브리타니아(.. 2025. 7. 10.
헨리 3세(King Henry III)의 왕권을 노린,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2편 전편에 이어 시몽 드 몽포르의 헨리 3세와의 본격적인 갈등과 그의 정치 개혁 의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1248년, 헨리 3세(King Henry III of England)는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를 프랑스 남서부의 잉글랜드 영토인 가스코뉴(Gascony)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맡깁니다. 시몽은 처음에는 이 임무를 꺼렸지만, 가스코뉴 영토에 대한 7년 동안의 절대 권한과 경비 보전을 해주겠다는 헨리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지에 도착한 뒤 가스코뉴 귀족들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강경하게 진압한 방식은 곧 논란이 되었습니다. 즉, 그는 법적 절차 없이 귀족들을 탄압하고 군사력을 사용해 질서를 회복하려한 행동에 대해 현지 귀족들은 헨리.. 2025. 7. 9.
헨리 3세(King Henry III)의 왕권을 노린,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1편 오늘은 헨리 3세(King Henry III)의 왕권을 노린 헨리 3세 여동생 엘리너(Eleanor)의 남편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208년, 프랑스 몽포르트(Montfort)에서 태어난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는 알비주아파(Albigenses)를 토벌한 십자군 지도자였던 시몽 드 몽포르 라마우리(Simon de Montfort l’Amaury)의 아들로, 프랑스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성년이 된 그는 장남 아모리(Amaury)에게 가문 영지를 양도하는 대신, 외할머니 아미시아(Amicia)를 통해 물려받을 수 있었던 잉글랜드의 레스터 백작위를 받을 계승권을 얻어 냈습니다. 사실, 외할머니 아미시아는 비몽포르 가문 출신인 로버.. 2025. 7. 8.
80%가 농노였다고? 잉글랜드 계급 사회의 충격적 실상 잉글랜드 역사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계급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12세기와 13세기 중세 잉글랜드의 사회는 피라미드 형태의 봉건적 계층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구조는 대부분 출생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각 계층은 고유한 역할과 책임, 권리를 가지며 사회의 기능을 나누어 담당하였습니다. 사회적 이동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층 계급에 속해 평생을 보냈습니다. ✋잠깐!잉글랜드의 중세시대 당시 계층 구조는 유럽 봉건제도에 기반하여 계급 별 인구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1. King(왕) - 당연히 1명입니다.2. Greater Nobles(상급 귀족) - 공작, 백작, 대영주 등 전체 인구의 약 0.1% 이하를 차지했습니다.3. Lesser Nobl.. 2025. 7. 7.
반란 귀족과 매제에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은 왕, 헨리 3세(King Henry III of England)의 서사 앞서 이야기 중에 자주 등장한 존 왕(King John)의 아들 헨리 3세(King Henry III of England)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헨리 3세(Henry III, 1207년 10월 1일 ~ 1272년 11월 16일)는 1216년부터 1272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1234년부터 1258년까지 약 24년 동안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전통과 관례를 무시하는 통치 방식으로 인해 결국 귀족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1258년에는 그에 따라 중대한 개혁안인 의회 중심으로 국정을 다스리는 옥스퍼드 조항(Provisions of Oxford)에 서명했으나 귀족들의 분열을 틈타 폐기하고 다시 왕권을 사수하였고, 여동생 엘리너의 남편 '시몽 드 몽포르'에게 왕권.. 2025.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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