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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잉글랜드가 통일되기 전 앵글로색슨 7왕국이 아닌 9왕국?

by deepedit 2025.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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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플랫태저넷 왕조의 시작이였던 헨리 2세부터 헨리 3세의 시대까지 주요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헨리 3세 이후 그리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잉글랜드 왕의 시초부터 플랫태저넷 왕조의 창시된 배경을 먼저 알아보고자 합니다.

 

브리튼 섬을 정복한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의 주요 거점, 출처:wikipedia

 

410년경, 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철수하면서 브리튼(Britain) 섬(현재 영국)은 수백 년간 유지되던 정치·군사적 질서를 잃게 되었습니다. 로마 군대가 떠난 자리는 곧 혼란과 무정부 상태로 이어졌으며, 이 시기를 틈타 외부 민족들의 침입과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세력은 바로 앵글족(Angles), 색슨족(Saxons), 주트족(Jutes)과 같은 게르만계 부족들이었습니다.

✋잠깐!

브리타니아(Britannia)는 무엇이고, 브리튼(Britain)은 좀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브리타니아(Britannia)는 로마 제국이 브리튼 섬의 남부를 지배하던 시기에 사용된 행정적 명칭입니다.

서기 43년, 로마 제국은 브리튼 섬 남쪽에 원정군을 보내 이 지역을 정복하고, 이를 속주(Province)로 편입시켰습니다. 이때부터 이 지역은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대략 지금의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이 그 범위에 포함되었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지역은 당시 로마의 지배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브리타니아는 단지 지리적 표현이 아닌, 로마 제국의 행정적·군사적 지배를 전제로 한 공식 속주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는 이 지역에 도로, 요새, 공중목욕탕, 도시 설계 등 고도로 조직된 문명 체계를 이식하였으며,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브리타니아는 로마화된 지역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5세기 초, 로마 제국이 내부 혼란과 외부 침입으로 인해 쇠퇴하면서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브리타니아라는 행정 단위는 사라지게 됩니다.

반면에, 브리튼(Britain)은 보다 넓고 지속적인 지리적 개념입니다.

이 말은 고대부터 사용된 용어로, 브리튼 섬 전체 즉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스(Wales)를 포함한 큰 섬을 가리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리적 이름은 정치적, 문화적 의미도 내포하게 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흔히 '영국(Britain)'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Britain’이 영국 전체(United Kingdom)를 의미할 때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브리튼 섬(Great Britain)은 북아일랜드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지리적 구분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들은 브리튼 동부와 남부 해안을 따라 차례로 상륙하여, 점차적으로 자신들의 거주지를 확보하고 로마-브리튼계 주민들을 밀어내거나 동화시키며 영토를 넓혀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독립된 왕국들이 생겨났으며, 이들 중 주요한 왕국들이 역사에 기록된 바 있는 앵글로색슨 9왕국입니다.

 

사실 게르만계 부족들이 침략하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부족국가들이 난립하였지만,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9개의 왕국이 두드러졌습니다. 북부에는 버니시아(Bernicia)와 데이라(Deira), 동북부에는 린지(Lindsey), 동부에는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 내륙 중앙에는 머시아(Mercia), 남부와 남동부에는 켄트(Kent), 서섹스(Sussex), 에식스(Essex), 웨식스(Wessex), 그리고 각 왕국 사이의 완충 지대로 알려진 소규모 지역 군주국들이 존재했습니다.

 

604년, 버니시아와 데이라는 애설프리스(Æthelfrith)에 의해 통합되며 노섬브리아(Northumbria)로 보다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점차 통합과 흡수의 과정을 겪게 되었으며, 작은 왕국들은 사라지거나 더 큰 왕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 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앵글로색슨 7왕국은 노섬브리아, 이스트앵글리아, 머시아, 켄트, 서섹스, 에식스, 웨식스로 불리게 됩니다.

 

앵글로색슨 7왕국, 출처:wikipedia

 

사실 이 7 왕국들은 모두 불안정했으며, 결국 규모가 작은 왕국들은 더 강력한 왕국들에게 흡수되었는데, 이 흡수는 폭력, 경제적 우세, 또는 결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829년 무렵에 왕국은 결국 4개로 통합되었고, 노섬브리아(Northumbria), 머시아(Mercia),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 웨식스(Wessex)였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지방 세력이라기보다는, 각기 독자적인 군사력과 외교력을 갖춘 준국가급 왕국으로 성장했으며, 때로는 서로 동맹을 맺고, 때로는 치열한 전쟁을 벌이며 우위를 다투었습니다.

 

이 4 왕국 중에서 특히 머시아는 8세기 중반 애설볼드(Athelbald)와 오파(Offa) 왕의 통치 하에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부상하였으며, 일시적으로 다른 왕국들을 종속시키는 패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머시아는 잦은 내분과 외부의 침입으로 점차 힘을 잃게 되었고, 그 자리를 웨식스가 대신하게 됩니다.

 

865년 잉글랜드 전역은 거대한 외세의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덴마크계 바이킹, 즉 ‘이교도 대군(Great Heathen Army)이 대거 상륙하여 이스트앵글리아, 노섬브리아, 머시아를 차례로 침략하고 점령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노섬브리아는 스칸디나비아 왕국으로 전락하였고, 머시아와 이스트앵글리아 또한 장기간 바이킹의 지배를 받으며 쇠퇴하게 됩니다.

 

머시아에 발견된 바이킹, 출처:wikipedia

 

이러한 위기 속에서 상대적으로 외부 침입을 잘 방어해낸 웨식스 왕국은 더욱 강화됩니다. 878년, 에딩턴 전투(Battle of Edington)에서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은 바이킹 지도자 구트룸(Guthrum)이 이끄는 대군을 격파합니다. 이 승리는 웨식스 왕국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고, 바이킹과 평화 협정 '웨드모어 협정(Treaty of Wedmore)'을 체결하게 됩니다. 웨드모어 협정에서 주목할만한 내용은 잉글랜드는 명확히 두 구역을 나누며, 바이킹이 지배하는 노섬브리아, 이스트앵글리아, 머이사 동부 였고, 웨식스 및 머시아 서부 지역은 알프레드가 통치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웨식스의 왕 알프레드 대왕, 출처:britannica

 

이 평화 조약으로 알프레드는 군사적·외교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정통성 있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잉글랜드 남부 전역에 걸쳐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86년, 알프레드는 바이킹에 점령당해 있던 런던을 탈환하고, 이를 재건 및 요새화합니다. 이때 그는 런던을 머시아(Mercia)의 전통적인 도시로 인정하면서, 머시아계 귀족인 애설레드(Athelred)를 머시아의 영주(Lord of the Mercians)로 세우고, 자신의 딸 애설플레드(Athelflæd)와 혼인시켜 머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합니다.

 

이 시점부터 알프레드는 단순한 웨식스 왕을 넘어, 사실상 잉글랜드 남부 전체의 패자(overlord)로 자리매김하게 되며, 당대 문헌에서는 이때 알프레드를 ‘앵글인의 왕(Rex Anglorum)’으로 칭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927년, 알프레드의 손자 애설스탠(Athelstan)은 바이킹 세력을 북부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노섬브리아의 왕 에리크 블러드액스(Eric Bloodaxe)가 추방당한 뒤, 애설스탠(Athelstan)이 왕위에 올라 잉글랜드 전역을 통일한 최초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로써 수 세기에 걸친 7왕국 및 4왕국 시대는 마무리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잉글랜드(England)’라는 하나의 왕국이 출현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애설스탠의 초상화, 출처:wikipedia

 

다음편에선 애설스탠의 생애를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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