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2세(William II) 다음으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1세(King Henry I of England)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헨리는 1068년 9월, 요크셔(Yorkshire)의 셀비(Selby)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노르망디의 공작이자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왕위에 오른 윌리엄 1세(William I)이며, 어머니는 플랑드르(Flanders) 백작의 딸이자 프랑스의 국왕 앙리 1세(Henry I of France)의 조카인 마틸다(Matilda of Flanders)였습니다. 마틸다는 1068년 5월 11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Westminster Abbey)에서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윌리엄 1세가 1087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윌리엄 2세(William II)가 왕위를 이어받아 13년간 재위하였습니다. 한편, 형인 로버트 커토스(Robert Curthose)는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며 형제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반면 헨리는 왕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왕위 계승 가능성은 낮았으며, 처음에는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이 선택은 어린 헨리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되었고, 그 결과 그는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문해력이 뛰어난 아들이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헨리는 훗날 보클레르(Beauclerc, 글을 잘 쓰는 자)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헨리의 형 윌리엄 2세(William II)가 1100년 뉴 포레스트(New Forest)에서 사냥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죽음의 원인으로귀족 윌터 티렐(Walter Tirel)이 쏜 화살이 도망치는 사슴의 등에서 튕겨 나와 윌리엄의 가슴 중앙을 명중되었다고 하며, 이는 타살이 아닌 사고사로 간주되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윌리엄 2세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동생 헨리(Henry)도 함께 사냥에 동행 중이였고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격하고, 즉시 왕위 계승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특히 장남인 로버트 커토스(Robert Curthose)는 당시 제1차 십자군 전쟁(First Crusade)에 참전 중이었기 때문에, 헨리는 그의 공백을 틈타 빠르게 왕위 계승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형이 사망한 지 48시간 이내에 왕실 재정을 장악하고 국왕 선출 평의회(Ruling Council)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하였으며, 1100년 8월 6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Westminster Abbey)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며 잉글랜드 왕 헨리 1세(King Henry I of England)가 되었습니다.
헨리 1세(Henry I)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직면한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야망으로 가득 찬 형, 로버트 커토스(Robert Curthose)의 존재였습니다. 로버트는 이미 고(故) 윌리엄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바 있었고, 이에 따라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실 로버트의 왕위에 대한 집념은 오래전부터 드러나 있었습니다. 1078~1079년경, 그는 프랑스 왕 필리프 1세(Philip I of France)의 지지를 받아 부친 윌리엄 1세에 대항해 왕좌를 차지하려 했으며, 1087년 몽트(Mantes) 공성전 당시에도 다시 한 번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야망은 윌리엄 2세 재위 시기에도 계속되어, 윌리엄 2세는 1091년 노르망디(Normandy)를 직접 침공하며 형제 간의 갈등을 정리하려 했습니다.
헨리는 형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자신만의 정치 기반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특히 코텡탱 반도(Cotentin)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자 부유한 영지였고, 헨리는 이를 장악하여 실질적인 자치 권한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이는 형들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윌리엄과 로버트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헨리가 코텡탱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하자, 일시적으로 공동의 적으로 자리매김된 헨리를 제압하기 위해 윌리엄 2세와 로버트는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습니다. 즉 헨리의 야심은 두 형 모두에게 불편한 것이었고, 이를 견제하는 것이 각자의 입장에서 필요하여 몽생미셸(Mont-Saint-Michel)에서 헨리를 격퇴한 뒤, 코텡탱 반도(Cotentin, 현재의 셰르부르 지역)에 있던 그의 영지를 빼앗기도 했었습니다.
이후 로버트는 제1차 십자군 전쟁(The First Crusade)에 참가해 뛰어난 전공을 세우며 명성을 높였고, 십자군에서 돌아온 그는 다시 잉글랜드 왕위를 노렸습니다. 1101년 7월, 로버트는 포츠머스(Portsmouth)에 상륙하며 침공을 시도했지만, 전투보다는 협상을 택해 헨리 1세와 평화적인 타협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5년동안 로버트는 넉넉한 연금을 받는 대신 왕위에 대한 실질적인 요구를 접게 되었고, 헨리 1세는 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노르망디 내에서 로버트를 지지하는 반란 귀족들이 다시금 세력을 키웠는데, 당시 로버트를 지지했던 주요 귀족 중 하나는 벨렘(Belleme) 가문의 로베르 드 벨렘(Robert de Bellême)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노르망디 전역에 걸쳐 막강한 영지를 소유한 귀족으로 그의 영향력은 주변 귀족들을 규합할 정도로 컸으며, 윌리엄 2세 시절부터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 왔었습니다.
또한 노르망디 내 다수의 소영주들과 군사력 기반을 가진 기사단 일부도 로버트를 지지하며 헨리 1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잉글랜드 출신인 헨리 1세가 노르망디 공작위를 가져가는 것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고, 로버트가 더욱 합법적인 공작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헨리 1세는 첩보를 통해 노르망디 내 로버트 지지 세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꾸준히 보고 받고 있었고, 헨리 1세는 로버트와의 권위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노르망디 귀족들을 회유하거나 위협하는 외교전도 병행하고 있었는데, 몇몇 귀족들이 로버트 측에 가담하거나 음모를 꾸미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직접 개입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1102년 로버르 드 벨렘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반란 조짐을 알고 그들을 체포하고 영지를 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잔재 세력이 여전히 남아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남아있는 불씨가 다시 큰 화마가 될것을 불안해 했떤 헨리 1세는 로버트를 완전히 제재하기로 결심하며 1106년 탕슈브레 전투(Battle of Tinchebray)를 일으키게 됩니다.
철저히 전투 준비를 해온 헨리 1세와는 달리 로버트는 전투 준비가 상당히 미약한 상태였었고, 노르망디 전역의 모든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또한 일부 귀족들은 로버트 지지를 철회하고 헨리를 지지하며 분위기가 와해되었고 이 틈을 탄 헨리 1세의 기병대가 로버트의 방어진을 격파하면서 결국 로버트는 퇴보도 못한 채 잡히고 맙니다.
패배한 로버트는 헨리 1세에 의해 잉글랜드 남서부에 있는 데비지즈 성(Devizes Castle) 등에 20년간 감금되었고, 이후 웨일스 중심에 있던 카디프 성(Cardiff Castle)에서 8년간 감금되다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탕슈브레 전투에서 승리한 헨리 1세는 윌리엄 1세 이후 분열되었던 영국과 노르망디를 통합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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