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의 시대를 연 윌리엄 1세의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윌리엄 1세는 생애의 마지막 15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노르망디(Normandy)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어떤 해에는 잉글랜드에 전혀 오지 않을 만큼 장기간 프랑스에 머무르기도 했으며, 그동안 잉글랜드의 통치는 신뢰할 만한 교회의 인물들에게 위임했습니다. 특히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랭프랑크(Lanfranc)를 깊이 신뢰하며 그에게 나라의 안정과 질서를 맡기며 잉글랜드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1066년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노르망디의 국경 방어에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잉글랜드의 왕이 아닌, 여전히 프랑스 내 노르망디 공작령의 통치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대륙의 위협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특히 주의 깊게 지켜본 지역은 매느(Maine)과 벡생(Vexin) 지역이었는데, 이곳은 노르망디와 프랑스 왕령지가 인접한 접경 지대여서 국경 분쟁의 소지가 매우 높았으며, 특히 벡생은 세느강(Seine River)이 연결된 전략적 지역으로 프랑스 왕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1066년 윌리엄이 잉글랜드로 건너간 사이 노르망디의 상황은 위험한 상황으로 급변해 갔습니다. 1068년, 풀크(Fulk the Surly)가 앙주(Anjou)를 계승했고, 1071년에는 로베르(Robert the Frisian) 플랑드르(Flanders)를 차지했습니다. 두 인물 모두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King Philippe I of France)와도 동맹을 맺으며 윌리엄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왔고, 로베르는 심지어 덴마크의 크누트 4세(Knut IV)와도 연합하여 윌리엄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한편, 윌리엄의 장남 로버트 커터스(Robert Curthose)도 문제였습니다. 그는 왕령지에서 별도 영지를 부여받지 못했고 자금도 부족하여 1077년 노르망디를 떠나 윌리엄의 적들 풀크와 로베르와 함께 음모를 꾸미며 아버지를 배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의 장남 로버트 커터스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떠나기 전, 1075년에 이른바 백작들의 반란(Revolt of the Earls)’이 일어났고, 이는 윌리엄 1세 치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된 대규모 귀족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의 주역은 노퍽 백작 랄프 드 가엘(Ralph de Gael, Earl of Norfolk), 헤리퍼드 백작 로저 드 브르퇴유(Roger de Breteuil, Earl of Hereford), 그리고 노섬브리아 백작 왈시오프(Waltheof, Earl of Northumbria)였습니다. 이들은 윌리엄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틈을 타 잉글랜드 내의 앵글로-노르만 귀족 세력을 규합해 반기를 들었는데, 주 배경은 윌리엄의 중앙 집권적 통치와 노르만 귀족에 대한 권력 분산 억제, 그리고 자신들의 봉토 상속 및 독립성 보장 문제에 대한 불만이 주 원인이였습니다.
윌리엄은 백작들의 반란 소식을 듣고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격적인 군사 대응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반란이 전국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대려 각 지역의 주교와 백작들이 윌리엄을 지지하면서 반란군을 고립시켰고, 반란이 빠르게 수습되었습니다.

반란에 가담한 랄프 드 가엘(Ralph de Gael)은 프랑스 브리타뉴(Brittany)로 도주했으며, 그의 아내 엠마(Emma)는 노리치 성(Norwich Castle)에 남아 저항했지만 곧 항복하고 브리타뉴로 추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로저 드 브르퇴유(Roger de Breteuil)의 경우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습니다. 반면 왈시오프(Waltheof)는 반란 직전 윌리엄에게 음모를 이실직고 했지만,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하나로 나중에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윌리엄은 반란이 끝난 뒤 백작들의 봉지를 모두 몰수하고 더 신뢰할 수 있는 노르만 귀족들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중앙 권력을 다시 공고히 했습니다. 이 반란은 윌리엄의 강력한 통치력과 잉글랜드 내 통제력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그의 치세 동안 더 이상 귀족 반란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윌리엄은 아들 헨리(Henry)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며 성인으로서의 첫걸음을 인도했고, 동시에 잉글랜드 전역의 주요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며 자신의 왕권을 한층 더 굳건히 다졌습니다. 이렇듯 윌리엄은 비록 대부분의 시간을 노르망디에서 보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직접 개입하며 잉글랜드의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했습니다.
1081년, 백작들의 반란을 정리하고 난 후 윌리엄은 다시 자신의 장남 로버트 커터스를 풀크와 로베르로부터 빼내오기 위해 블랑슐랜드 조약(Treaty of Blanchelande)을 서명했는데, 조약 내용 중 핵심은 로버트가 풀크를 봉신한다는 전제 하에 로버트에게 매느 백작(Earl of Maine) 지위를 주겠다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윌리엄 입장에선 아들의 지위를 겨우 보장하기 했지만, 노르망디의 권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습니다
1085년, 윌리엄 1세는 덴마크(Denmark)에서 위협적인 소식이 들려오자 다시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덴마크의 왕은 성군으로 추앙받았던 카누트 4세(Canute IV of Denmark)는 잉글랜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이전 잉글랜드의 영유권을 되찾기 위해 해군과 병력을 정비해 실질적인 공격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윌리엄은 사태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다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전국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해안 지역의 경비를 철저히 하며 전면전을 대비했지만, 덴마크 내부 귀족 반란으로 카누트(Canute)가 암살당하면서 침공은 이뤄지지 않았고 잉글랜드 역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윌리엄은 전쟁을 준비하며 동원된 자금을 살피면서 자국의 실질적인 자원과 세금 체계를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1086년, 윌리엄은 전국 토지 조사를 명령하였으며, ‘둠스데이 북(Domesday Book)’이라는 두 권의 방대한 기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잉글랜드 전역의 토지 소유 현황, 거주자 수, 가축, 경작지 면적, 세금 수입 등을 촘촘히 조사한 자료가 담겨 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중세 유럽 행정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업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둠스데이 북은 윌리엄의 통치가 단순한 정복에 그치지 않고 체계적인 행정력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로 남게 되었습니다.

윌리엄이 백작들의 반란에 대응하고 매느(Maine)와 벡생(Vexin)지역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1077년 노르망디와 가까운 벡생(Vexin) 지역의 몽트(Mantes) 백작령을 프랑스 국왕 필립에게 뺐기고 말았습니다. 벡생의 몽트(Mantes)를 되찾기 위해 윌리엄은 프랑스 국왕 필립에게 쇼몽(Chaumont), 몽트(Mantes), 퐁투아즈(Pontoise)를 다시 돌려달라 했지만 거절 당하자, 1087년 7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몽트를 급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 마을이 불타는 과정에서 윌리엄은 심한 중상을 입은 채 병마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원정이 결국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수행한 군사 행동이 되었습니다.
윌리엄은 루앙(Rouen) 바로 외곽에 있는 생제르베 수도원(Priory of St. Gervais)으로 옮겨져, 약 5주 동안 병상에 누워 몇몇 주교와 의사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의 이복형제인 모르탱 백작 로베르(Robert, count of Mortain)와 그의 어린 아들들인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 그리고 헨리(Henry)가 시중을 들고 임종을 맞이 했습니다. 로버트 커토스는 프랑스 국왕 필립과 함께 있었어 아버지의 임종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윌리엄은 당시 관습대로 로버트에게 자신의 모든 상속 재산을 주어야 했으나, 충성스러운 루퍼스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고 싶어 노르망디(Normandy)와 매느(Maine)는 장남 로버트에게 주어지고 노르망디 공작에 작위 받고 로버트 2세(Robert II, Duke of Normandy)가 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셋째 루퍼스에게 넘겨 주며 왕위를 갖게 되었고, 이 때부터 루퍼스는 윌리엄 2세(King William II of England)주었습니다. 막내아들 헨리의 경우 영지를 구매할 수 있는 막대한 재산을 주었으며, 윌리엄은 60세의 나이로 9월 9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윌리엄의 죽음은 곧 그의 호칭 윌리엄 정복왕의 시대가 끝났음을 뜻했으며, 동시에 그가 세운 노르만 왕조의 내부 분열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선 내부 분열에 따라 윌리엄의 막내 아들 헨리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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