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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헨리 1세(Henry I) 2편, 수 많은 정부(Mistress)를 둔 잉글랜드 왕

by deepedit 2025.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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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1세(King Henry I of England)의 형 로버트 커터스(Robert Curthose)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전과 후의 상황을 알아봐야겠습니다.

헨리 1세의 왕비 마틸다(Matilda), 출처:ERH

형의 죽음으로부터 단 4일 만인 1100년 8월 5일, 그는 웨스트민스터 수도원(Westminster Abbey)에서 왕으로 즉위 하였고, 그는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즉시 대관 헌장(Coronation Charter)을 발표하며 교회 정책을 개혁하고, 귀족들의 재산권을 존중할 것임을 약속하였습니다.

 

헨리 1세는 왕에 즉위 하자마자, 앵글로색슨(Anglo-Saxon) 왕가의 혈통을 지닌 마틸다(Matilda)에게 청혼하였는데, 이는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다보니 노르만 왕조가 앵글로색슨의 뿌리를 대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마틸다와의 결혼을 통해 "정통성과 민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바로 마틸다에게 청혼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헨리 1세는 마틸다의 오빠는 스코틀랜드 왕 말콤 3세(Malcolm III of Scotland)의 아들 스코틀랜드 왕 에드거(Edgar of Scotland)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 왕실간의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마틸다와 결혼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나, 마틸다가 수녀원에서 지냈던 과거사로 인해 그녀는 수녀 일지 모르며 수녀라면 결코 결혼을 할 수 없다라는 당시 교회법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마틸다(Matilda)는 누구며 수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분하여 헨리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틸다의 본래 이름은 에디스(Edith)로, 앵글로색슨식 이름이었으며, 웨식스 왕조(Wessex Dynasty) 왕가 출신으로 스코틀랜드 왕 말컴 3세(Malcolm III of Scotland)와 웨식스의 성녀 마거릿(Saint Margaret of Wessex)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마거릿은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Edward)와 그의 아내 아가타(Agatha)의 딸이었습니다.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엑사일(Edward the Exile)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콘페서(King Edward of England, Edward the Confessor)의 조카였고, 어린 시절 헝가리로 망명했었던 웨식스 왕조의 후손 중 한 명이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왕 말콤 3세와 왕비 마거릿, 출처:wikitree

 

스코틀랜드의 진주(The Pearl of Scotland)”라 불렸던 마틸다의 어머니 마거릿(Margaret)은 헝가리 왕국(Kingdom of Hungary)에서 망명 중 태어났으며, 해롤드 2세(Harold II) 사후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한 비공식적인 계승자 에드거 애설링(Edgar Ætheling)의 여동생이였고 잉글랜드 왕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Edmund Ironside)의 손녀이자,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마틸타의 어머니 스코틀랜드 왕비 마거릿, 출처:wikitree

 

마틸다는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Hampshire)의 로물리 수도원(Romsey Abbey)과 윌셔(Wiltshire)의 윌턴 수도원(Wilton Abbey) 두 곳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곳에는 그녀의 이모 크리스티나(Cristina)가 윌턴 수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로물리 수도원과 윌턴 수도원은 잉글랜드 귀족의 자년들이 교육받았던  명문 수도원이였습니다.

 

현재 영국 남부 햄프셔에 있는 로물리 수도원(Romsey Abbey), 출처:wikipedia

 

그녀의 이모 크리스티나는 윌리엄 2세(William II of England)의 음욕으로부터 마틸다를 보호하기 위해 수녀복을 입게 하였다고 하며, 이 소식을 들은 말콤 3세는 결혼 가능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1093년경 마틸다는 한 잉글랜드 귀족과 약혼했으나, 1903년 아버지와 오빠 에드워드(Edward)가 윌리엄 2세(William II)와의 알른위크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사망하며 약혼은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녀의 삼촌 도널드 3세(Donald III), 이복오빠 던컨 2세(Duncan II), 오빠 에드거(Edgar) 사이에 복잡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으며, 1097년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아 에드거가 왕위에 오르며 정리되었습니다.

 

알른위크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사망한 말콤 3세의 십자가, 출처:wikipedia

 

순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약혼하려다 무산되 아무것도 아닌 마틸다는 단지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녀 서약을 받았을 거라 추측했고, 헨리와의 결혼 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안셀름은 이를 판단하기 위해 람베스 궁(Lambeth Palace)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공의회는 마틸다가 수녀원에서 생활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수녀가 된 것은 아니며, 따라서 결혼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안셀름 대주교는 이 판단을 승인하며 마틸다는 헨리 1세와의 결혼이 허용되었습니다.

 

1100년 11월 11일, 헨리는 스코틀랜드의 마틸다(Matilda of Scotland)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Westminster Abbey)에서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헨리 1세의 나이는 약 31세였는데 귀족 남성의 결혼이 늦는 일은 그 당시에는 드문 일은 아니였다고 합니다.

 

헨리 1세와 마틸다 결혼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출처:bbc

 

마틸다는 헨리 1세의 왕비로서 능력 있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때로는 잉글랜드에서 섭정(regent)으로 활동하였고, 의회를 주재하거나 참석하였으며,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곧 자녀를 낳았으며, 1102년에 딸 마틸다(Matilda), 1103년에 아들 윌리엄 애들린(William Adelin)이 태어났습니다. 그 외에도 어린 시절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리처드(Richard)라는 둘째 아들이 있었을 거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 마틸다는 종교적 이유와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것을 즐겨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 머무르는 것을 선호했었으며, 헨리 1세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전역을 돌아다니며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사실 헨리 1세는 잉글랜드 역사 상 성욕이 강한 왕 중 한 명 이였다고 합니다. 헨리 1세는 마틸다와 결혼 전, 이후에도 많은 성적 파트너를 두었으며, 다수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합니다. 알려진 바로는 아들 9명, 딸 13명 이상이 있었으며, 그는 그들 대부분을 자식으로 인정하고 지원했다고 합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결혼하지 않은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 귀족 남성이 창녀나 지역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일반적이었으며, 왕 역시 정부를 두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계 중 일부는 헨리 1세가 결혼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기도 했지만, 마틸다와 결혼 이후에도 상당수의 관계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헨리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이 관계들은 비교적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귀족 여성을 정치적 이유로 정부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마틸다와의 결혼 후 헨리 1세(Henry I)의 형 로버트 커터스(Robert Curtherse)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였고, 알톤 조약(Treaty of Alton)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로버트는 헨리 1세를 왕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다음편에서는 헨리 1세(Henry I)의 재정 및 조세 관리의 체계화, 중앙 행정 강화 등에 대한 이야기와 탕슈브레 전투 이후 교회와의 임명권 문제, 왕의 법을 새롭게 세우는 등의 이야기를 이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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