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시몽 드 몽포르의 헨리 3세와의 본격적인 갈등과 그의 정치 개혁 의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1248년, 헨리 3세(King Henry III of England)는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를 프랑스 남서부의 잉글랜드 영토인 가스코뉴(Gascony)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맡깁니다. 시몽은 처음에는 이 임무를 꺼렸지만, 가스코뉴 영토에 대한 7년 동안의 절대 권한과 경비 보전을 해주겠다는 헨리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지에 도착한 뒤 가스코뉴 귀족들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강경하게 진압한 방식은 곧 논란이 되었습니다. 즉, 그는 법적 절차 없이 귀족들을 탄압하고 군사력을 사용해 질서를 회복하려한 행동에 대해 현지 귀족들은 헨리 3세에게 직접 탄원하며 시몽을 고발하였습니다.
사실 헨리의 명을 받들어 반란을 저지하려 했떤 시몽이 귀족들로부터 논란이 된 배경은 왕의 대리인일지라도 법을 무시한채 자의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던 봉건시대였기 때문이였습니다. 또한 귀족 역시 왕실 행정의 부패와 귀족의 자율성 침해, 그로인한 반감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헨리 3세의 왕권이 약함을 틈타 집단 지방의 무질서와 권위 도전에 가까웠지만, 시몽이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헨리 3세에게 탄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헨리는 시몽을 소환해 재판에 회부하지만, 1252년 잉글랜드 본국의 귀족(반란족들과 다른 귀족)들은 시몽에게 군정 지휘관으로서의 재량권을 인정하고 무죄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나 헨리는 이미 정치적 부담과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해 그를 해임한 뒤 가스코뉴에서 철수시키게 됩니다. 시몽은 이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로 돌아가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프랑스에서는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 중립적이고 신뢰받는 인물로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실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Louis IX)가 십자군으로 출정 중이던 시기, 그의 모후 블랑슈 드 카스티유(Blanche of Castile)가 섭정(Regent) 중에 급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프랑스 귀족들은 시몽에게 섭정직을 제안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몽은 잉글랜드 정계 복귀와 루이 9세의 조기 귀환의 가능성을 고려해 섭정을 거부했는데, 프랑스 귀족들은 시몽과 같은 나라를 이끌만한 출중한 인물을 계속 기다려왔던거 같고 그 중 대세로 작용한 인물이 바로 시몽 드 몽포르 였다고 합니다.
한편, 헨리 3세는 1250년대에 들어 점점 더 비현실적인 외교적 모험에 빠져들었습니다. 특히 1254년경, 교황 인노첸시오 4세(Pope Innocent IV)의 요청을 받고 자신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Edmund)를 시칠리아 왕(King of Sicily)으로 앉히려는 계획은 심각한 재정적 무리를 초래했습니다. 이 시칠리아 정복 사업은 군사적 기반도 불확실한 데다, 막대한 교황청에의 헌금 부담을 동반했기에 국내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시몽은 이러한 헨리의 무능과 방만한 통치에 실망하였고, 점차 왕의 권력을 제약하려는 정치 개혁 운동의 중심 인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만프레디(Manfred)가 시칠리아를 장악하는 상황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만프레디는 슈타우펜 왕조(Hohenstaufen) 출신으로,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의 사생아였지만, 교황에 대항하는 이단자이자 위협적인 세력으로 간주해 시칠리아를 친교황 세력에게 주려 했던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헨리 3세에게 시칠리아 왕을 그의 아들 에드먼드에게 내줄테니 대신 정복하는데 소요되는 자금을 모두 부담하라고 약언하라 했습니다. 이는 곧 잉글랜드의 재정을 파탄시키고 정치 위기와 불만을 자극시키는 요소가 되었고, 실질적인 군사 원정도 하지못해 교황청에 주겠다고 약언한 정복 자금 조차도 갚아야 할 채무가 되게 되었습니다.
본 사건이 헨리 3세의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가되었습니다.
결국 1258년, 시몽은 잉글랜드의 다른 유력 귀족들과 함께 헨리 3세에게 '옥스퍼드 조항(Provisions of Oxford)'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 조항은 왕의 독단적 권한을 제한하고, 국가 행정을 감시하는 평의회를 설치하도록 요구한 일종의 제도적 개혁안이었습니다. 시몽은 이 개혁이 모든 귀족, 심지어 국왕 자신도 지켜야 할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로 개혁을 주도했고, 자신과 아내 엘리너의 정당한 재정 보상 문제까지 이 틀 속에서 밀어붙이려 하면서 다른 귀족들 사이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이로 인해 보수파 귀족들, 특히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Richard de Clare)는 점점 시몽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개혁 진영은 분열을 맞게 됩니다.
1261년까지 상황은 점점 시몽에게 불리해졌고, 헨리 3세는 교황으로부터 옥스퍼드 조항 이행 서약을 면제받은 뒤 개혁을 공식 폐기합니다. 시몽은 이에 반발하며 프랑스로 떠나지만, 곧 전국적인 불만이 다시 고조되면서 1263년 잉글랜드로 귀국해 무장 반란을 일으킵니다. 런던 시민, 소귀족, 기사 계층, 종교인 등 폭넓은 지지층이 시몽의 귀환을 환영했고, 그는 다시 헨리를 압박해 옥스퍼드 조항을 부활시킵니다. 하지만 귀족들 간의 분열은 여전히 봉합되지 않았고, 결국 왕과 시몽 양측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게 중재를 요청하게 됩니다.
루이는 1264년 초, 아미엥 조약(Mise of Amiens)을 통해 개혁 조항을 모두 폐기하고 헨리의 손을 들어줍니다. 시몽은 이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력 충돌을 결심합니다. 그는 같은 해 5월 14일 루이스 전투(Battle of Lewes) 에서 헨리 왕과 왕자 에드워드(훗날의 에드워드 1세)를 포로로 잡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를 통해 시몽은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왕은 그 아래에서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합니다.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던 시몽은 1265년 1월, 역사상 처음으로 기사(knights)와 시민 대표(burgesses)를 모두 포함한 의회(Parliament) 를 소집합니다. 이는 오늘날 하원(Commons)의 시초로 평가받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시몽은 '입헌주의의 선구자'로 기록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력 집중은 내부 균열을 불러왔습니다. 특히 그의 핵심 동맹이었던 젊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는 시몽의 독단에 불만을 품고 왕당파로 돌아섭니다.
그 결과, 감금돼 있던 왕자 에드워드는 탈출에 성공하고, 군사적 주도권은 다시 왕당파로 넘어갑니다. 에드워드는 민첩한 전술로 시몽의 지원군을 케닐워스(Kenilworth) 인근에서 격파한 뒤,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Battle of Evesham) 에서 시몽의 주력을 완전히 포위합니다. 시몽은 전투 중 전사하게 되었고, 그의 시신은 잔혹하게 훼손되어 성당 묘지에 매장조차 허락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비록 무력으로 패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는 후대에 이르러 의회주의와 제한 군주제의 상징적인 인물로 재조명되었으며, 그의 1265년 의회는 영국 입헌정치의 기초를 세운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실 시몽 드 몽포르는 단순히 왕이 되고 싶었던 야심가도, 순수한 도덕적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정치적 현실과 도덕적 비전을 함께 품은 중세적 개혁가였으며, 그의 개혁은 당시 귀족 중심의 권력 질서를 넘어 대표성과 책임성이라는 새로운 정치 원칙을 실험한 것이라 역사학자들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시몽은 왕이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왕의 권력을 법과 제도로 제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 이상이 미완에 그쳤을 뿐, 그의 의회는 영국 헌정의 기틀을 만든 역사적 이정표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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