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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윌리엄 1세(William I) 3편, 이중 통치 전략과 피로 세운 잉글랜드의 질서

by deepedit 2025.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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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Normandy)로부터 달려와 잉글랜드(England)를 정복해 왕위에 오른 윌리엄(William I)에게는 끊임없는 반란과 반란이 이어졌는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의식용 검과 보주를 들고 왕관을 쓰고 즉위한 모습의 윌리엄 1세의 인장, 출처:wikipedia

 

앞서 1편과 2편에 전한 것과 같이 윌리엄은 이미 전투와 정치 모두에 능숙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노르망디(Normandy)에서 충성심이 부족한 귀족들과 공직자들을 자신의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로 교체하고, 봉신 간의 사적인 전쟁을 억제했으며, 공작으로서의 권한을 되찾고 봉건 질서를 정비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노르망디 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윌리엄은 그 체제를 잉글랜드(England)의 전통에 맞게 조정하려 했습니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가 통지한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와 메인, 그리고 잉글랜드, 출처:themiddleages

 

윌리엄이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에서 각각 다르게 통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정치적 상황과 윌리엄의 입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노르망디는 윌리엄이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권력을 다져온 기반이었습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키는 귀족들을 제거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로 공직과 봉신 체계를 재편했으며, 공작으로서의 권위를 강화해 봉건 질서를 안정시켜 교회와 행정 모두 그의 통치 하에 움직이도록 만들었습니다.

 

반면, 윌리엄은 그들의 잉글랜드의 왕이지만 외부 정복자이자 침략자로 왕위에 오른 상황이다 보니 중앙집권 행정이 강한 기존 행정과 왕권 체계를 바로 없앨 수 없어, 서서히 자신의 봉건 질서를 계몽하려 했습니다. 즉,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는 자신의 권위로 완전한 질서를 구축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기존 틀 위에 천천히 자신의 지배 방식을 더해간 것입니다.

 

그는 당대의 많은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도덕적으로 개혁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왕권에 복종하길 원했습니다. 성직 매매(Simony)를 단호히 반대하였고 성직자의 결혼 역시 금지하였습니다. 그는 주교나 수도원장이 왕권에 도전하거나, 교황의 지나친 개입이 있으면 이를 용납하지 않았지만, 로마의 교황 알렉산데르 2세(Pope Alexander II)와 그에 이은 교황 그레고리 7세(Pope Gregory VII)와는 대부분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곤 했습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교회에도 많은 개혁의 변화를 주었는데, 먼저 교회 정책과 개혁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회의하는 시노드(Synod), 크게는 전국 단위의 회의인 공의회(Council)를 자주 개최하였고, 중요한 사안이 있는 경우 시노드나 공의회에 직접 참여하거나 주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070년에 윌리엄은 자신을 봉신했었던 노르망디 백스 수도원의 수도원장(Abbot of Bec Abbey) 파비아 랭프랑크(Lanfranc of Pavia)를 기존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건(Stigand, Archbishop of Canterbury)을 해임하고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왕 윌리엄(크고 찐한 십자가)과 그의 왕비 마틸다, 그리고 랭프랑크 대주교가 서명한 공의회 기록물, 출처:wikipedia

 

또한, 윌리엄은 기존 앵글로 색슨 출신의 주교들을 대부분 해임하고 노르망디 출신의 성직자들로 교체했는데, 그 중 우체스터 울프스탄(Wulfstan of Worcester)만은 예외로 남겨 두었습니다. 울프스탄을 해임 없이 주교에 그냥 나두었던 이유는 윌리엄이 잉글랜드 정복 후 왕위에 올랐을 때 윌리엄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 했었고, 성실하고 도덕적이며, 노르만 왕조의 지배에 유일하게 협조적이였던 앵글로색슨 고위 성직자였기 때문이였습니다. 윌리엄은 또한 수도원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여 노르망디에서 데려온 수도승과 수도원장들을 잉글랜드에 배치하고, 잉글랜드의 수도원 문화를 대륙 유럽과 조화되도록 개편했습니다.

 

1067년, 윌리엄은 잠시 잉글랜드를 떠났지만, 같은 해 말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반란은 크게 3번에 걸쳐 일어났으며, 첫번째 해롤드 고드윈슨의 가족과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윌리엄에 저항한 1068년 북부 반란, 두번째 해롤드의 가족, 앵글로색슨 귀족들, 그리고 덴마크 왕 스베인 2세(King Sweyn II of Denmark)의 군대가 연합해 북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1069년 덴마크-잉글랜드 연합 반란, 세번째 동부 펜 지역의 엘리섬(Isle of Ely)을 중심에 있는 잉글랜드 귀족 헤레워드 더 웨이크(Hereward the Wake)와 머시아(Mercia)의 에드윈(Edwin), 모카(Morcar) 등이 이끈 1070~1071년 엘리섬 반란이였습니다. 

 

덴마크 왕 스베인 2세의 두개골로 만든 두상, 출처:wikipedia

 

특히 1069년의 덴마크-잉글랜드 연합 반란에서 윌리엄은 매우 가혹한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당시 사람들조차 충격을 받을 만큼 잔혹한 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 전통에 따라 방어 요충지에 성채를 세웠고, 런던 탑(Tower of London)도 이때 건설된 성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1071년까지 모든 반란이 진압되었고, 윌리엄은 앵글로색슨 귀족들을 대부분 처형하거나 추방하였고, 이들의 영지를 몰수해 충성스러운 노르망디 출신 귀족들에게 분배했습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상위 귀족 계층은 대부분 노르만 출신으로 교체되었으며, 윌리엄은 봉건적 충성 체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통치 질서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이 건축한 런던 탑(현재는 화이트 타워(White Tower)로 불림), 출처:wikipedia

 

윌리엄(William)은 잉글랜드 북부의 안전을 확보하고 스코틀랜드와의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해 1072년에 직접 스코틀랜드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 목적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 말콤 3세(King Malcolm III of Scotland)가 윌리엄의 통치에 위협이 되는 세력과 손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콤 3세는 1069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반란에 가담해 요크(York)를 공격하고, 잉글랜드 왕위의 또 다른 계승자였던 에드가 애설링(Edgar Ætheling)을 보호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윌리엄의 왕위 정당성이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잠깐!

윌리엄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잉글랜드 왕위의 유력한 계승자였던 '에드가 애설링(Edgar Ætheling)'은 누구인가?

에드가 애설링은 에드가 2세로 불리는 에드워드 엑사일(Edward the Exile)의 아들로,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Edmund Ironside)의 손자입니다.

즉, 그는 앵글로색슨계 잉글랜드 왕가였던 웨식스 왕조의 직계로, 애설스탠(Aethelstan), 에드먼드 1세(Edmund I), 에드가 피스풀(Edgar the Peaceful), 그리고 에드워드 마터(Edward the Martyr) 등으로 이어지는 고대 잉글랜드 군주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덴마크 왕 크누트(Cnut)가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때 망명하여 동유럽에서 자라다 에드워드 콘페서(Edward the Confessor)의 초청으로 귀국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해 왕위 계승자 후보로 남은 이가 바로 에드가 애설링이었습니다.

그러나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 이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자, 에드가는 사실상 왕위에서 배제되었고, 귀족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즉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윌리엄에게 잠시 항복했으나, 노섬브리아(Northumbria)를 중심으로 한 반노르만 세력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1069년에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스코틀랜드 왕 말콤 3세(King Malcolm III of Scotland)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사실 말콤 3세는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을 반기지 않았었고, 북부 잉글랜드의 혼란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하는데 애드가를 이용했었습니다. 특히 그는 에드가 애설링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에드가의 여동생 마가렛(Margaret)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왕위에 정통성을 부여해 윌리엄에 맞서는 정치적 연대를 형성하는데 이용했습니다.

즉, 말콤은 웨식스 왕조의 직계 에드가를 통해 잉글랜드 북부의 영토 확장을 위한 계략을 부린 스코틀랜드의 왕이였고,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활용된 자가 바로 잉글랜드 왕의 계승자 에드가 애설링였습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윌리엄은 군사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압박했고, 결국 스코틀랜드 왕 말콤은 굴복하여 1072년 애버네시 조약(Treaty of Abernethy)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을 보면 말콤은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에드가 애설링을 추방한다 였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 북부의 국경은 비교적 안정세에 접어들게 되었고, 윌리엄은 이를 계기로 노섬브리아(Northumbria)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경계를 확립하고, 북방의 위협을 잠재우는 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윌리엄은 서부의 웨일스(Wales) 지역에도 시선을 돌렸습니다. 1081년, 그는 병력을 이끌고 웨일스를 원정하였고, 이 과정에서 명확한 국경선을 긋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국경 지대에 '마처 백작령(Marcher Earldoms)'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백작령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으며, 백작들은 거의 자치 수준의 권한을 부여받아 웨일스 지역의 저항 세력을 억누르는 데 전념했습니다.

 

1081년 당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국경

 

결과적으로 윌리엄의 이러한 군사적 조치들은 잉글랜드 북부와 서부 국경의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하였고, 그의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선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의 인생 후반부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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