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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윌리엄 1세(William I) 2편,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다

by deepedit 2025.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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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반란과 위협 속에서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의 시대를 연 윌리엄의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윌리엄 1세의 출생지인 프랑스 노르망디 팔레즈(Falaise)에 있는 윌리엄 1세의 동상, 출처:wikipedia

 

1054년부터 1060년까지 윌리엄(William)은 내부 귀족들의 반란과 프랑스 왕 앙리 1세(Henri I of France), 앙주의 조프루아 마르텔(Geoffrey Martel of Anjou)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동맹이라는 복합적인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만약 노르망디(Normandy) 반란군이 프랑스 왕과 앙주 백작과 3 연대로 연합하여 공격했다면 윌리엄은 아마 몰락했을지도 모르지만, 앙리 1세와 조프르아 마르텔이 지원한 반란 귀족세력과의 이해관계가 충돌이 나고 무너지며 윌리엄에게 더욱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모르테메르 전투를 묘사한 삽화, 출처:wikipedia

 

1054년, 모르테메르 전투(Battle of Mortemer)에서 윌리엄은 앙리와 조프루아의 연합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고, 이어 1057년 바라빌 전투(Battle of Varaville)에서도 또한 승리하며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1060년, 앙리 1세는 병사로 그리고 조프루아 마르텔은 병사 또는 자연사로 모두 사망하고 그 후계자들이 약체였던 덕분에 윌리엄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 졌습니다. 그리고 1063년에는 조프루아 마르텔의 앙주 지역과 노르망디 경계에 있던 지역인 메인(Maine)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그는 북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1064년 경, 잉글랜드(England) 왕 에드워드(Edward)는 자신의 매형인 고드윈(Godwine)의 아들, 웨식스(Wessex) 백작 해럴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 외교 사절로 노르망디에 보냈습니다. 해럴드는 도중에 윌리엄의 봉신 중 귀욤 1세 드 퐁투(Guy I of Ponthieu)에게 붙잡혔으나 윌리엄은 헤럴드와의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그를 위해 몸값을 지불하여 그를 구출해주었습니다. 이후 브리타니(Brittany) 원정 전투에 함께 동행하며, 해럴드는 에드워드가 윌리엄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한 맹세를 전달하고 그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윌리엄은 훗날 이 맹세를 어긴 해럴드는 명백히 반란자이자 배신자라고 주장했고, 교황 알렉산데르 2세(Pope Alexander II) 역시 윌리엄의 주장을 지지하며 축복의 깃발(Papal Banner)를 보내주게 되었는데, 이는 윌리엄이 잉글랜드 침공의 큰 명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윌리엄에 보낸 교황 깃발, 출처:wikipedia

 

1066년 1월 5일,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잉글랜드 귀족들은 해럴드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이에 윌리엄은 전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공작령을 안정시키고 국제적 지지를 얻기 위한 조처를 먼저 취했습니다. 그는 귀족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아내 마틸다(Mathilda)에게는 노르망디의 내정과 질서 유지, 귀족 통제에 대한 권한을 주었고 아들 로버트(Robert)에게 상징적인 본인의 후계자 역할을 주었으며, 그의 충성스러운 인물들인 로저 드 몽고메리 (Roger de Montgomery)에게는 노르망디 남부 섭정직에, 이복동생인 오도 드 바요(Odo of Bayeux)에게는 노르망디 교회 통제와 재정 조달, 오랜 친구이자 전쟁 동지였던 윌리엄 피츠오스번 (William FitzOsbern)에게 군사 및 전략 조율자로 임명하였습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정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교황청의 축복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는 직접 로마(Rome)에 사절을 보내 교황에게 침공 계획을 설명하고, 이를 승인해 달라며 청원을 올렸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 출처:wikipedia

 

이 요청을 받은 당시 교황은 알렉산데르 2세(Pope Alexander II)였으며, 그는 교황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힐데브란트(Hildebrand)의 조언을 참고했으며, 힐데브란트는 훗날 개혁 교황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그레고리오 7세(Gregory VII)가 되는 인물로, 도덕성과 교회 권위 강화를 중시하던 성직자였습니다. 힐데브란트는 윌리엄의 침공이 혼란한 잉글랜드를 안정시키고, 교회의 이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보았고, 결국 교황은 윌리엄의 계획을 지지하며 공식적인 축복과 깃발을 선사하였습니다. 이는 윌리엄에게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 승리였습니다.

 

교황의 지지를 얻은 윌리엄은 이를 바탕으로 노르망디 외부에서도 광범위하게 지원군과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플랑드르(Flanders), 브르타뉴(Brittany) 등지의 기사들이 윌리엄의 대의명분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일부는 영국에서의 새로운 영지 분봉을 기대하며 그에게 합류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윌리엄은 자신의 봉토인 노르망디 외에도 대륙 전역에서 병력과 자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이후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윌리엄이 3번의 가짜 퇴각 교란 전술을 펼친 헤이스팅스 전투, 출처:britishbattles

 

그러나 상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되었습니다. 해럴드의 망명한 동생 토스티그(Tostig)는 5월에 잉글랜드를 침략했으나 해럴드의 동맹군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이어 9월, 토스티그는 노르웨이(Norway) 왕 하랄드 3세 하드라다(Harald III Hardraade)와 손잡고 노섬브리아(Northumbria) 해안을 침공하였습니다. 비록 이 연합군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Battle of Stamford Bridge)에서 패배했지만, 이로 인해 해럴드 군은 소모되고 남부 방어는 허술해졌습니다. 이는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1066년 여름,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와 함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북부 디브 강 하구(Dives River)에서 병력을 집결시켰고, 와이트섬(Isle of Wight)과 사우샘프턴 만(Southampton Water)을 통해 잉글랜드 남부로 침공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계속되는 역풍(불리한 바람) 때문에 배가 출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9월이 되자 강한 서풍 때문에 함대는 북쪽으로 밀려가고 말았고, 윌리엄은 프랑스의 생발레리(Saint-Valéry-sur-Somme)로 이동해 다시 병력을 정비해야 했습니다. 이때 많은 병사들이 지치고 사기가 떨어졌고, 일부 해군은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연이 오히려 뜻밖의 이득을 줬습니다. 해럴드는 윌리엄의 침공에 대비해 남부 해안에 농민 징집병을 배치해두었는데, 9월이 되어도 공격이 없자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덕분에 해안 방비가 약해졌고, 9월 27일, 드디어 바람이 윌리엄에게 유리하게 불자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출항했으며, 다음 날 아침 큰 저항 없이 페븐시(Pevensey)와 헤이스팅스(Hastings)에 상륙했습니다. 윌리엄은 약 4,000~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었고, 상륙 후 곧바로 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상륙 전 잉글랜드 북쪽 요크(York) 근처에서 있던 해럴드는 노르웨이의 하랄드 3세(Harald III Hardrada)와 자신의 이복형 토스티그(Tostig)와의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Battle of Stamford Bridge)를 치르고 승리를 취했지만, 많은 손실과 피해를 입은 채 윌리엄에 대응하기 위해 남쪽으로 남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해럴드는 윌리엄의 거점 근처까지 진군 후 방어진을 구축하고 다음날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를 시작하게 됩니다.

 

잉글랜드 왕 해럴드 고드윈슨, 출처:bbc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승리한 해럴드는 북부 침략을 막은 직후, 노르망디군의 상륙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급히 이동했으며, 해럴드는 윌리엄의 노르망디군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헤이스팅스 인근 고지에 방어진을 구축했습니다.

 

첫 전투 당시 윌리엄의 궁수와 기병들은 해럴드의 병사들이 구축한 단단한 방어진을 쉽게 뚫지 못해 고전중에 있었습니다. 새로운 전략을 고심한 윌리엄은 일부 부대를 도망치는 척 물러나게 해 해럴드 측 병사들이 진형을 이탈해 쫓아오게 만들고, 진형을 깨트려윌리엄의 기병들이 급습할 수 있게 하여, 해럴드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는 단 한번으로 끝난 전략이 아닌 무려 3번이 반복되었고, 후에 해럴드의 방어진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는 눈에 화살을 맞고 결국 전사하였으며, 해럴드의 군대 역시 해럴드가 쓰러지자 조직력을 잃어가며 모두 항복하고 전투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1세가 정복한 노르망디,메인과 잉글랜드, 출처:M&MAHT

 

전쟁 종료 이후 윌리엄은 저항 세력이 새롭게 재편되기 전에 중심 지역까지 모두 점령하게 되었고, 106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그는 웨스트민스터 수도원(Westminster Abbey)에서 왕관을 쓰고 왕위에 오르며 새로운 노르만 왕조의 잉글랜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잉글랜드 왕 윌리엄의 대관식이 열린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출처: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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