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역사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계급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12세기와 13세기 중세 잉글랜드의 사회는 피라미드 형태의 봉건적 계층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구조는 대부분 출생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각 계층은 고유한 역할과 책임, 권리를 가지며 사회의 기능을 나누어 담당하였습니다. 사회적 이동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층 계급에 속해 평생을 보냈습니다.
✋잠깐! 잉글랜드의 중세시대 당시 계층 구조는 유럽 봉건제도에 기반하여 계급 별 인구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King(왕) - 당연히 1명입니다. 2. Greater Nobles(상급 귀족) - 공작, 백작, 대영주 등 전체 인구의 약 0.1% 이하를 차지했습니다. 3. Lesser Nobles(하급 귀족) - 남작, 기사, 지방 영주 등 전체 인구의 약 1.5~2.0% 였습니다. 4. Clergy(성직자) - 고위 성직자 즉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은 전체 인구의 약 0.5% 였습니다. - 하위 성직자 즉 사제, 수도사, 집사 등은 전체 인구의 약 4~7% 였습니다. 5. Freemen(자유민) - 중간 계층인 자유민은 크게 프랭클린, 예오먼, 장인, 상인 등으로 구성돼, 전체 인구의 약 10~15% 정도 였다고 합니다. 6. Serfs/Villani(농노) - 농노도 상급/중급/하급으로 나뉘며 상급 빌리언, 중급 보르다르, 하급 코타리 등과 같은 농노들은 전체 인구의 약 70~80% 였습니다. 7. Slaves(노예) - 마지막 노예는 12세기까지만 존재했고 이 후 법적으로 사라지고 농노로 전환되었고, 전체 인구의 약 5% 였습니다. |
최상위 계층으로 당연히 왕(King)이 존재하였습니다.
왕은 노르만 정복 이후 법적으로 잉글랜드 전역의 모든 토지를 소유한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이를 귀족들에게 분봉하여 정치적 충성 및 군사적 지원을 받았습니다. 왕은 입법, 사법, 과세, 전쟁, 외교의 최고 권한을 지녔으며, 실제로는 귀족들과의 협상과 세력 균형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왕 아래에는 귀족 계층(Nobility)이 존재하였습니다.
이들은 다시 상급 귀족(Greater Nobility)과 하급 귀족(Lesser Nobility)으로 나뉘며, 상급 귀족에는 공작(Duke), 백작(Earl), 마퀴즈(Marquess), 대영주(Magnate) 등이 포함되며, 왕실과 가까운 혈통을 지녔거나 막대한 토지를 보유한 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때때로 왕권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정치·군사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봉지를 지배하였습니다.
하급 귀족은 남작(Baron), 기사(Knight), 작위를 가진 지방 영주 등을 포함하며, 왕 또는 상급 귀족으로부터 봉지를 받아 충성을 맹세하고, 해당 지역을 관리하며 병력을 제공하였습니다. 하급 귀족은 명예직으로서 작위만 가진 경우도 많았으며, 일부는 토지 없는 ‘명목상 귀족’이었습니다. 귀족 전체는 인구의 약 1~2%에 불과하였지만, 전체 토지의 약 75%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귀족 외에도 사회적 위계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한 계층은 바로 성직자(Clergy)였으며, 성직자도 고위 성직자(High Clergy)와 하위 성직자(Low Clergy)로 구분되었다고 합니다.
고위 성직자에는 대주교(Archbishop), 주교(Bishop), 대수도원장(Abbot) 등이 포함되며, 이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상급 귀족과 동일한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는 국왕의 자문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더럼(Durham)의 주교는 ‘프린스-주교(Prince-Bishop)’로서 자신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영지를 독립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고위 성직자는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상원(Lords Spiritual)에 참여하며 왕국 통치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반면, 하위 성직자에는 일반 사제(Priest), 집사(Deacon), 수도사(Monk), 수녀(Nun) 등이 포함되며, 대부분 출신은 농민 또는 중간 계층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교회나 수도원에서 교육, 설교, 의료, 자선 등의 역할을 맡았으며, 성경 필사나 기록 보존,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중간 계층(Middle Class)으로는 자유민(Freemen)이 있었고, 이들은 프랭클린(Franklins), 예오먼(Yeomen), 장인(Craftsmen), 상인(Merchants), 도시 시민(Burghers)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법적으로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토지를 직접 소유하거나 임대하여 자립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13세기 이후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이들은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점차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일부는 부를 축적하여 하위 귀족과 유사한 수준으로 상승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유민 계층은 전체 인구의 약 10~15%를 구성되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측했습니다.
자유민 다음으로는 농노(Serfs/Peasants) 계층이 있었습니다.
농노는 가장 인구가 많은 하위 계층으로 전체 인구의 약 70~80%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들은 법적으로 영주의 토지에 묶여 있었으며, 세금과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농지를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농노는 일반적으로 이동의 자유가 없었으며, 농도 역시 ‘빌리언(Villani)’, ‘보르다르(Bordars)’, ‘코타리(Cottars)’ 등으로 신분 세분화 되어 있었습니다.
빌리언(Villani)은 비교적 넓은 토지를 경작하고 가족 단위로 생활한 상급 농노였고, 하급 농도로는 보르다르와 코타리가 있었습니다. 보통 소규모 토지나 작은 오두막을 보유하고 있거나 영주의 저택에서 가사 및 부속 노동을 담당하곤 했던 계층이 보르다르(Bordars)였고, 마지막 코타리는(Cottars) 가장 낮은 농노로 작은 주거지만 보유했을 뿐 경작할 토지가 매우 작거나 없는 농노로 영주에게 의존하며 노동력을 제공하며 살아왔었습니다. 또한 이들의 삶은 극도로 열악하였으며, 기근, 질병, 과중한 세금 등으로 인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지막 노예(Slaves)는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존재하였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점차 법적으로 소멸하였습니다. 12세기에는 거의 모든 노예가 농노로 전환되었으며, 인구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1세기 초에는 10%에 달했지만 13세기에는 사라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노예는 매매 대상이었지만 농노는 법적으로 매매가 불가능하였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였습니다.
계층 간 이동은 매우 드물었지만, 일부 예외적인 경로는 존재하였습니다. 군사적 공훈으로 기사 작위를 받거나, 교육을 통해 성직자 또는 도시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대표적이었습니다. 교회는 유일하게 평민에게 교육과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통로였으며, 도시의 상업 활동 또한 일부 농민에게 부를 축적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특히 14세기 흑사병 이후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농노들의 이탈과 자유민 증가로 사회 구조가 변화하기도 했습니다.
계층 간 삶의 질은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귀족과 고위 성직자는 풍요롭고 정치적 권한이 있었던 반면, 하위 농민은 생계조차 위태했었으며, 중간 계층은 이 두 계층 사이에서 사회적 상승을 도모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의복법(Sumptuary Laws) 등과 같은 신분 규제로 그 이상으로 상승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의복법(Sumptuary Laws)이란, 각 계층이 입을 수 있는 옷의 재질, 색, 장식, 스타일 등을 법으로 제한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홍색 벨벳은 왕과 공작만 입을 수 있었고, 금실이나 모피는 귀족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중간 계층 사람이 아무리 부유해도 이런 법 때문에 귀족처럼 보이는 것이 불법이었고, 사회적으로 상승하는 데 장벽이 되었습니다.
중세 잉글랜드의 계층 사회의 특이한 사실로는, 중세 도시의 거리명에 ‘Gropecunt Lane(그로프컨트 레인, 여성의 음부를 만질 수 있는 골목이라는 뜻으로 매춘 거리를 말함)’ 같은 표현이 실제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민중의 일상과 거리 문화는 솔직하고 거칠었습니다. 즉, 현대의 위선적이거나 점잖은 표현 방식과 달리, 중세 민중은 감추지 않고, 꾸미지 않고, 생생하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살아 왔으며 ,언어와 문화 모두 더 직설적이고 본능적인 수준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또한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일정 재산을 보유한 평민이 ‘튠(Thegn)’이라는 준귀족 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는 법적 여지도 존재했다고 하는데, 1066년 노르망디 정복 이후 튠 칭호는 남작(Baron) 또는 기사(Knight)로 대체되었고, 모든 계층은 점점 세습화되어 계층 변화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자유민(Freemen)이였던 프랭클린과 예오먼은 중세 후기부터 의회 정치와 근대 시민 사회의 밑바탕을 형성하는 중간 계층으로 성장하게 되고, 잉글랜드의 의회 정치, 입헌주의, 시민사회 발전의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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