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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1세(William I) 1편, 노르만 왕조의 서막을 연 잉글랜드의 왕의 탄생

by deepedit 2025.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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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를 4번째로 통일시킨 왕, 노르만 왕조의 시조 윌리엄 1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 출처:wikipedia

 

1028년, 윌리엄(William)은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1세(Robert I of Normandy)와 그의 첩 에를레바(Herleva, 혹은 아를레트(Arlette)라고도 불리며, 팔레즈(Falaise) 출신의 무두장이 혹은 장의사의 딸)의 두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윌리엄이 태어난 이후 에를레바는 로버트 1세의 첩의 신분이여서 신분 상승과 명예 회복을 위해 콩트빌(Conteville)의 비스카운트였던 에를랭(Herluin)과 결혼하였으며, 이들 사이에서 두 아들(그 중에는 훗날 바유(Bayeux)의 주교가 되는 오도 드 바유(Odo de Bayeux)와 로버트 드 모르탕(Robert de Mortain))과 딸 하나가 태어났습니다. 1035년, 로버트 1세는 예루살렘(Jerusalem) 순례에서 돌아오던 중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급사로 사망하기에 이르렀고 그 때 그의 유일한 아들이였던 윌리엄을 후계자로 지명해두었습니다. 그 때 당시 약 7세~8세였던 윌리엄은 노르망디의 유력 귀족들과 그의 주군이었던 프랑스 왕 앙리 1세(King Henri I of France)로부터 공작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그는 노르망디의 윌리엄 2세(William II of Normandy)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왕 헨리 1세, 출처:wikidata

 

그러나 윌리엄과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출생이 사생아(Illegitimacy)라는 점과 어린 나이에 공작위에 올랐다는 점이 앞으로 횡보에 큰 장애물이였습니다. 그의 나약함으로 인해 공국 전체의 통치력이 무너졌고, 사적으로 성들이 세워지며 하급 귀족들이 공권력을 탈취하고, 개인 간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윌리엄이 성장하기 전까지 그의 후견인 세 명이 모두 폭력적으로 죽임을 당했으며, 그의 스승 토르다르(Turdar)도 암살 당했습니다. 아버지의 친족들 대부분 역시 윌리엄이 죽어야 자신들에게 이득이 돌아온다고 여겼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그의 어머니 에를레바는 가장 위험했던 시기를 지나며 그를 보호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윌리엄의 어머니 에를레바가 어린 윌리엄을 보호한 이유는 자신과 아들의 생존이 가장 우선이자 이는 본인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윌리엄이 성공할수록 그녀의 사회적 지위도 상승하는 구조였으며, 재혼을 통해 다른 두 아들과 딸의 성공적인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결정적 열쇠이기도 했습니다. 즉, 단순 모성애로 윌리엄을 보호하기 보단 에를레바 본인 스스로의 목숨과 가족 전체의 구조 상승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였음을 말합니다. 

 

또한, 윌리엄 역시 단순 유년기 내내 고난과 권모술수, 배신, 암살과 같은 역경들이 후일 철저한 중앙 집권과 무자비한 권력 행사를 추구하는 통치자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윌리엄은 1042년에 15세가 되어 기사 작위를 받고 공국의 정사에 직접 참여하며 안정된 삶이 시작 되었습니다만, 그는 무정부 상태 동안 상실된 권리를 회복하고 불복종하는 봉신과 관리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1046년부터 1055년까지 그는 주로 친족들이 주도한 일련의 귀족 반란에 맞서 싸우면서 프랑스의 왕 앙리 1세 (King Henri I of France)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싸우는 법과 다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1047년, 앙리와 윌리엄이 카앙(Caen) 남동쪽의 발-에-뒤뉴(Val-ès-Dunes) 전투에서 노르망디 반란 귀족 연합군을 물리쳤는데, 이 때 윌리엄은 전사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처음으로 드러냈다고 합니다.

 

반란 귀족세력과의 격전지 발-에-뒤뉴(Val-ès-Dunes), 출처:wikipedia

 

윌리엄은 곧 젊은 혈기의 무모함을 통제하는 법을 익혔고, 언제나 계산된 위험을 감수하고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화려한 지휘관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단순했고, 방법은 직접적이었으며, 기회가 오면 가차 없이 이를 이용했으며,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지체 없이 철수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통치에서도 드러났습니다. 그는 한시도 잃어버린 공작의 권리와 수입을 회복하겠다는 목표를 놓치지 않았고, 비록 체계적인 통치 이론이나 행정 기술에 큰 흥미는 없었지만, 언제나 상황에 따라 즉흥적이고 실용적인 시도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윌리엄(William)은 당시 기준으로 도덕적이고 경건한 인물이었으며, 노르망 교회(Norman church)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1049년, 약 16세였던 이복동생 오도(Odo)를 바유(Bayeux) 주교로 임명하였고, 오도는 주교로서 귀족과 성직자의 역할을 겸하는 방식으로 당대인들을 대했습니다. 윌리엄이 임명한 오도와 다른 주교들이 영성(靈性)으로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경건한 기부와 행정 능력으로 노르망 교회를 강화시켰습니다.

 

윌리엄과 그의 주교들은 수많은 교회 공의회를 주재하며 성직 매매(Simony)와 성직자 결혼(Clerical Marriage)을 금지하는 중요한 법률을 제정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해외에서 온 수도승과 학자들 환대히 맞이하기도 했는데, 그 중 자유 예술의 유명한 대가인 파비아(Pavia)의 란프랑크(Lanfranc)가 있었으며, 란프랑크는 약 1042년에 베크(Bec) 수도원에 입회하여 1063년 캉(Caen) 수도원의 수도원장(Abbot)이 되었다고 합니다. 윌리엄은 자신의 공국 내 여러 수도원에 기부하며 수도원 수를 크게 늘리면서 수도원의 개혁을 이끌어 왔다고 합니다.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 외부에 있는 란프랑크 대주교 동상, 출처:wikipedia

 

1047년 이후 윌리엄(William)은 노르망디 공작령(Normandy)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정치·군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왕 앙리 1세(King Henri I of France)를 도우며 남쪽 경계를 강화하려고 했고, 인접한 메인 백작령(Maine)을 자기 세력 아래 두기 위해 앙주 백작 제프리 마르텔(Geoffrey II Count of Anjou, Martel)과 여러 차례 군사적 충돌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1052년 프랑스 왕 앙리(Henri)와 앙주의 백작 제프리 마르텔이 화해하면서, 이 둘이 이전에 윌리엄에게 적대적이던 세력과 다시 손을 잡아 노르망디 동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반란은 윌리엄의 권력 기반을 위협했고, 공작령 내에서 여러 귀족과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윌리엄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커졌습니다.

 

게다가, 윌리엄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불법 출생이라는 약점과 아직 어린 나이 때문에 내부 귀족들의 신뢰를 완전히 얻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군과 외부 세력들이 동시에 윌리엄에게 압박을 가하며 그를 위험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더 컨페서(Edward the Confessor)와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잉글랜드 왕위 상속인으로 인정받아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동시에 결혼을 통해 외교적 기반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잠깐!

여기서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더 컨페서로부터 왕위의 후계자로 인정받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윌리엄(William)이 잉글랜드 왕위의 상속인이 된 과정은 여러 복잡한 인연과 정치적 상황이 얽혀 있습니다. 먼저, 윌리엄과 당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더 컨페서(Edward the Confessor)는 먼 친척 관계였습니다. 윌리엄의 할아버지와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형제자매였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혈연적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에드워드는 왕위에 오르기 전 프랑스 대륙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어린 윌리엄과 만났고,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 내에서 왕위 계승 문제가 불안정해지자, 에드워드는 자신의 왕위가 확실하지 않던 상황에서 윌리엄을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쪽으로 협상을 진행하였습니다.

1051년경에 시작된 이 협상은 1064년이나 1065년에 윌리엄과 관련된 중요한 약속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에드워드 왕은 자신의 매제인 해럴드(Harold Godwinson)를 노르망디에 보내 윌리엄과의 약속을 확인하게 하였고, 해럴드는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이 충성 서약은 윌리엄이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이 될 것이라는 뜻이었지만, 당시 잉글랜드 내에서는 모두가 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에드워드가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나자, 해럴드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약속은 깨졌고, 이것이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략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윌리엄은 혈연 관계와 정치적 협상, 그리고 서약을 통해 잉글랜드 왕위 상속인이 되었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반대와 갈등을 겪게 된 것입니다..

 

1049년, 윌리엄은 플랑드르(Flanders)의 강력한 귀족 발드윈 5세(Baldwin V)와 그의 딸 마틸다(Matilda)와의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발드윈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헨리 3세(Henry III)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외부 동맹이 절실했습니다. 윌리엄 또한 정치적으로 힘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동맹이 필요했죠. 이 둘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고 결혼을 추진했지만, 교황 레오 9세(Pope Leo IX)는 두 사람이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며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과 발드윈은 강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결혼은 1052년쯤 이루어졌습니다.

 

결혼 이후 윌리엄은 교황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1059년, 아내 마틸다와 함께 속죄의 의미로 프랑스 캉(Caen) 지역에 수도원 두 곳을 세웠습니다. 이 부부 사이에서는 네 명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장남 로버트(Robert)는 나중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고, 둘째 리처드(Richard)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셋째 윌리엄(William Rufus)은 훗날 잉글랜드 왕이 되었고, 막내 헨리(Henry)는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딸 중 한 명인 아델라(Adela)는 훗날 잉글랜드의 왕 스티븐(Stephen)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여기 윌리엄의 넷째 헨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잉글랜드 왕 헨리 1세(King Henry I of England) 입니다.

 

잉글랜드 왕 헨리 1세, 출처:wikipedia

 

윌리엄은 이 결혼과 플랑드르와의 동맹을 이용해,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로부터 자신이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1051년, 에드워드는 윌리엄에게 일종의 후계자 약속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같은 해, 잉글랜드의 유력 귀족 가문인 고드윈(Godwine)의 아들 토스티그(Tostig)는 발드윈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하면서 이 삼자 동맹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이 동맹은 각자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전략적 결합이었고, 윌리엄에게는 훗날 잉글랜드 왕위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는 윌리엄의 험난한 역경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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