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대왕에 이어 잉글랜드를 처음으로 통일시킨 애설스탠의 삶을 알아보겠습니다.
애설스탠(Athelstan, 또는 애셀스탠 Aethelstan)은 에드워드 왕(Eadward the Elder)의 아들이자,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의 손자(Grandson)입니다. 그는 에드워드의 첫 번째 아내 엑그윈(Ecgwynn) 사이에서 서기 894년경 태어났습니다. 에드워드가 924년에 사망하자, 그의 또 다른 아들인 이복형제 엘프워드(Aelfweard)가 곧바로 왕위를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에는 웨식스(Wessex) 세력이 지지를 보냈으며, 반면 머시아(Mercia)는 애설스탠을 지지했습니다.
엘프워드는 에드워드의 사망 후 단 3주 만에 애설스탠을 위해서(?) 또는 시기 상 알맞게 사망하였고, 애설스탠은 머시아와 웨식스 모두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위에 대한 도전을 우려한 애설스탠은 또 다른 형제인 에드윈(Edwin)을 작은 보트에 아무런 식량이나 장비 없이 태워 떠내보내는 방식으로 추방하기도 했습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에드윈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이 일에 깊은 후회를 느낀 애설스탠은 이후 자선 활동에 헌신하며, 자신의 영지마다 일정 수입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고, 젊은 범죄자들에게 좀 더 관대한 법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후대에는 학식 있고 지혜로운 왕으로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도둑질과 무법행위에 대해 큰 우려를 가지고 있었으며, 알프레드 대왕이 시작한 법률 개혁을 추진했으며, 교회를 세우고 성유물 수집에도 힘썼습니다. 이전 왕들보다 유럽 정치에도 훨씬 더 관심을 가졌으며, 자신의 여러 자매들을 유럽의 통치자들과 혼인시켜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 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926년, 자신의 여동생 이디스(Edith)를 요르빅(Jorvik, 오늘날의 York)의 왕 시흐트리크(Sihtric Cáech)와 혼인시켰으며, 시흐트리크는 사망하고 난 후 , 애설스탠은 이를 계기로 요르빅(Jorvik)를 장악 후 노섬브리아(Northumbria)를 정복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여동생 이디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1세(Otto I)와 재혼하였으며, 다른 두 자매중 애드힐드(Eadhild)는 프랑크 왕국 귀족 로베르트, 애드기프(Eadgifu)는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왕(Charles the Simple)과 결혼했습니다.
시흐트리크의 사촌 구드프리스(Guthfrith)는 왕좌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지만, 애설스탠은 요르빅을 점령하여 그를 저지했고, 데인족은 그의 지배에 복종하였습니다. 927년 7월 12일,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 2세(Constantine II), 데헤우바르트(Deheubarth)의 하웰 다(Hywel Dda) 왕, 밤버러(Bamburgh)의 엘드레드(Ealdred) 왕, 그리고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의 오와인(Owain) 왕이 페너리스(Penrith) 근처의 이먼트(Eamont)에 모여 애설스탠을 자신들의 왕의 왕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로써 애설스탠은 ‘잉글랜드인의 왕(King of the English)’이라 부를 정당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사실, 헨리 시대부터는 영토 중심의 왕권 개념이 잡히기 시작해 왕을 'King of England'라 불렀지만, 애설스탠이 7왕국을 통일 할 당시에스는 영토 중심이 아닌 앵글로색슨족 모두가 하나의 민족이고 같은 사람이라는 개념속에 'King of the English(잉글랜드인의 왕)'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애설스탠은 934년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며 콘스탄틴 2세에게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는데, 이 원정에는 4명의 웨일스 왕들과 18명의 주교들이 동행하였으며, 그의 군대는 오늘날 스코틀랜드 북부의 더노타(Dunottar)까지 북상했고, 해군은 스코틀랜드 해안을 따라 공격하여 당시 노르드 왕국 오크니(Orkney)의 일부였던 케이스니스(Caithness)까지 진격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937년 콘스탄틴은 스트래스클라이드와 더블린(Dublin)의 지원을 받아 애설스탠을 공격하는 브루넌버흐 전투(Battle of Brunanburh)를 치뤘으나 애설스탠과 그의 이복동생 에드먼드(Edmund)와의 전투에 처참히 패배하게 됩니다. 브루넌버흐 전투로 애설스탠은 켈트 왕국 콘월(Cornwall)만 제외하고 잉글랜드 전 지역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전투가 되었고,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브루넌버흐 전투를 통해 애설스탠은 브리튼의 모든 앵글로색슨족을 통합해 지배한 최초의 왕이 되었으며, 그의 치세 동안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군주들이 그의 궁정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고 왕의 칙령문에 서명하면서, 사실상 전 브리튼의 왕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애설스탠은 평생 건강한 군주로 알려져 있었으며, 939년 10월경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평온히 임종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에드워드와 형 알프워드가 묻힌 윈체스터(Winchester)가 아니라 말름스버리 수도원(Malmesbury Abbey)에 안장되었습니다.
애설스탠 사후 왕권 공백과 왕위 계승의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바이킹 세력이 다시 회복하면서 앵글로색슨의 북부 잉글랜드 지배력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이복동생 에드먼드(Edmund)와 이드레드(Eadred)가 노섬브리아 재정복에 전신을 바쳤다고 합니다. 물론 에드먼드가 요르빅을 되찾긴 했으나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의 피욱(Pucklechurch)에서 궁정 내 반란자에게 암살 당한 후 바이킹에게 다시 빼앗기게 됩니다. 954년즈음, 이드레드가 바이킹 왕 에리크 블러드액스(Eric Bloodaxe)를 노섬브리아에서 몰아내고 앵글로색슨이 다시 잉글랜드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애설스탠은 최초의 진정한 잉글랜드을 통일시킨 왕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중세 잉글랜드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수도원 개혁의 토대를 닦고, 효율적인 행정 및 사법 체계를 구축했으며, 잉글랜드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애설스탠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임에도 후계자 없이 죽고, 할아버지인 알프레드 대왕의 업적에 가려진 ‘잊혀진 왕(The Forgotten King)’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선 애설스탠 이후 그의 이복동생 이드레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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