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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윌리엄 2세(William II) 1편, 왕이 되자마자 반란 두 번을 겪은 윌리엄 2세의 불안한 왕좌

by deepedit 2025.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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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King William I of England) 죽음 후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은 그의 셋째 아들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King William II of England), 출처:wikipedia

 

윌리엄 루퍼스(William Rufus)는 붉은 얼굴빛으로 인해 ‘루퍼스(Rufus, 붉은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아버지 윌리엄 1세가 가장 아꼈던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봉건적 관습에 따라 아버지는 장남 로버트 커터스(Robert Curthose)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주어야 했으나 반란에 가담한 장남보단 본인에게 충성심이 높았던 셋째 윌리엄 루퍼스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로버트 커터스는 왕 윌리엄 1세의 고향인 노르망디(Normandy) 공국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노르만(Norman) 귀족들은 그들의 이권과 세력을 넓히기 위해 잉글랜드와 노르망디가 하나의 지배자 아래 통합되길 바랬으며, 잉글랜드 왕 윌리엄 루퍼스가 아닌 노르망디 공작인 로버트 커터스가 왕이 되길 갈망했습니다. 이에 따라 윌리엄 루퍼스가 왕에 즉위 하자마자 이들은 로버트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윌리엄의 숙부인 켄트 백작이자 바요의 주교 오도(Bishop Odo of Bayeux)가 이끄는 반란이 1088년 잉글랜드 동부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바요 태피스트리, 자수 기록물에 묘사된 바요의 주교 오도의 모습, 출처:wikipedia

 

바요의 주교 오도(Odo of Bayeux)는 윌리엄 루퍼스가 왕위에 오른 직후인 1088년, 로버트 커토스(Robert Curthose)를 지지하며 반란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노르만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하나의 군주가 다스려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로버트를 잉글랜드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습니다.

 

오도는 과거 윌리엄 1세에 의해 한 차례 투옥된 적이 있었고, 이로 인해 윌리엄 1세의 셋째 윌리엄 루퍼스 역시 계속 그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오도는, 윌리엄 루퍼스가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권력이 축소되거나 박탈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반면, 오도는 형 로버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버트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윌리엄 루퍼스가 왕위에 오른 직후, 아직 통치 기반이 약하다는 점을 간파한 오도는, 이 기회를 틈타 노르만 귀족 여러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088년, ' 1088년의 반란(Rebillion of 1088)'이라 불린 오도의 반란 은 개인적 야망과 정치적 셈법, 그리고 당시의 권력 분열 상황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였습니다.

 

오도는 도버(Dover), 로체스터(Rochester) 등 잉글랜드 동남부에서 반란을 주도하였고, 이에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의 로버트 드 모브레이(Robert de Mowbray), 윌리엄 1세의 충신이였던 로저 드 몽고메리(Roger de Montgomery) 등 여러 노르만 귀족들도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는 빠르고 단호하게 대응하였으며, 런던 시민들과 앵글로색슨 귀족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도가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로체스터 성(Rochester Castle)을 포위하고 끝내 항복을 받아내어 반란을 진압하게 됩니다.

 

바요 주교 오도가 최후의 저항을 한 로체스터 성, 출처:wikipedia

 

반란이 실패로 끝나면서 오도는 다시 한 번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고, 로버트 커토스는 끝내 잉글랜드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윌리엄 2세는 자신의 왕권을 보다 공고히 할 수 있었고, 노르만 귀족들 사이에서 왕위에 대한 정당성과 권위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습니다.

 

1088년 반란 진압 이후 윌리엄 2세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귀족들과 앵글로색슨 민중들의 지지를 얻으며 왕권을 안정시켜 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특히 그는 당시 반란을 막아내는 데 협력한 귀족들과 시민들에게 토지 환원, 세금 완화, 정의로운 통치 등을 약속하며 지지를 공고히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윌리엄 2세는 이러한 약속들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과중한 세금 부과와 사치스러운 궁정 운영, 교회 재산의 착취 등으로 민심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을 저버린 그의 통치는 귀족뿐 아니라 성직자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불만을 키워갔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095년에는 또 다른 귀족 반란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번 반란은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Robert de Mowbray)가 주도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일부 북부 귀족들이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반란은 1088년의 대규모 봉기와는 달리 조직력이 미흡하고 지지 세력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윌리엄 2세는 더욱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윌리엄 2세는 반란의 조짐이 포착되자 즉시 병력을 동원해 북부로 진군하였고, 왕에게 충성하는 지역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더럼(Durham), 요크(York) 등지의 주요 거점을 확보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반란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며 포위망을 좁혀 갔습니다. 로버트 드 모브레이는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한 채 자신의 거점인 더럼 성(Durham Castle)으로 물러났지만, 윌리엄의 군대가 성을 포위하자 결국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하였습니다.

 

윌리엄 2세가 모브레이의 반란을 저지한 노섬벌랜드와 요크, 그리고 더럼 위치

 

이 반란의 빠른 진압은 윌리엄 2세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왕권 강화의 과정에서 민중과 귀족들 사이의 신뢰를 저버리고 있었고, 그 여파는 이후의 통치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잔혹한 응징, 교회와의 대립, 형과의 전쟁, 의문의 죽음까지—왕권 강화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윌리엄 2세의 파란만장한 최후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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