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잉글랜드 왕 존의 아내이자 헨리 3세(Henry III)를 낳은 앙굴렘의 이자벨(Isabelle of Angouleme)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이자벨은 존 왕(King John)이 앙굴렘(Angoulême)과 라 마르슈(La Marche)의 결합하는 것으로 막으려 했던 존 왕(King John)의 게획을 위그 10세와의 결혼을 통해 처참히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조안(Joan)은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이자벨의 잉글랜드 영지를 둘러싼 다툼은 1220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224년, 결국 이자벨은 위그(Hugh)와 함께 헨리 3세(Henry III)를 배신하고 프랑스 왕과 손을 잡게 되었고, 그 대가로 연금을 받고 프랑스의 포와투(Poitou) 침공을 지원했습니다.
1226년에 이자벨과 위그 10세는 헨리 3세와 화해했고, 1230년 헨리 3세가 브르타뉴(Brittany)와 포와투로 원정을 왔을 때, 어머니 이자벨은 12년 만에 아들과 재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생존 전략으로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 왕을 오가며 기회주의적으로 움직였는데, 1242년 헨리 3세가 포와투를 침공 당시 위그 10세는 초반에는 헨리 3세를 지지했으나 곧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며 헨리의 원정을 실패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이자벨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1241년 프랑스 왕 루이 9세(Louis IX)와 그의 동생을 독살하려 했다는 음모에도 연루되었으며, 독살범들은 이자벨이 보냈다고 주장했으나, 그녀는 그 혐의를 부인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위그 10세의 잦은 외도와 이혼 위협으로 두 번째 결혼은 첫 번째 결혼보다도 더 불안정했으나, 전보단 많이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 또한 그녀의 결혼 생활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1241년, 프랑스 왕비 앞에서 의자를 제공받지 못한 이자벨은 굴욕을 느꼈고, 위그가 프랑스 후보자를 지지하자 이에 분노하여 루지냥 성(Lusignan Castle)의 가구를 뜯어내고, 3일간 앙굴렘 성(Angouleme Castle) 출입을 막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총 9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중 에메르 드 뤼지냥(Aymer de Lusignan)과 윌리엄 드 발랑스(William de Valence)는 후에 영국에 와 이복형 헨리 3세(Henry III)의 후원을 받으며, 이는 플랜태저넷 왕권과 귀족 권한의 균형, 그리고 외세 개입에 대한 민감성을 가진 잉글랜드 귀족 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고, 이후 제 2차 남작 전쟁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1244년, 두번째 프랑스 왕 루이 9세(Louis IX)와 그의 동생 샤를 단주(Charles d’Anjou) , 두 명의 궁정 요리사가 독살 음모를 꾸미고 이는 이자벨의 지시였다고 말했습니다. 요리사의 처형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이자벨은 프랑스에서 추방되고, 1246년 퐁트브로 수도원(Abbaye de Fontevraud)에서 사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잉글랜드의 전 왕비였던 앙굴렘의 이자벨은 수도원 경내가 아닌 야외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헨리 3세는 어머니의 무덤을 찾았을 때 이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녀를 수도원 안으로 옮겨 헨리 2세(Henry II)와 엘리노어 아키텐(Eleanor of Aquitaine) 곁에 안장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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