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왕(King John)이 왕실 봉사를 강화시키기 위해 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에게 그웬트의 세개의 성(Three Castles of Gwent)를 하사한 전편 내용에 이어,
후버트(Hubert)는 점차 중대한 외교 임무에도 기용되었습니다. 1200년 그는 포르투갈 왕의 딸과 존 왕의 혼인을 추진하기 위한 대사로 파견되었으나, 존이 이자벨 당굴렘(Isabelle d’Angoulême)과 결혼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고, 1202년에 후버트는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팔레즈 성(Falaise Castle)의 성장(Castellan)이 되어, 존 왕의 조카이자 왕위 경쟁자였던 브타니의 아서(Arthur of Brittany)가 미르보(Mirebeau)전투에서 생포되고 난 후 아서를 감시하는 감시자 역할을 맏게 되었습니다.
이 때 존 왕이 아서를 거세하고 실명하게 하라는 명령을 했다고 하는데, 플랜태저넷 연대기(The Plantagenet Chronicles)에 따르면, “적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협박에 격분한 존 왕은, 마침내 분노와 광기에 휩싸여 세 명의 사절을 팔레즈로 보내 이 끔찍한 명령을 수행하게 했다.”라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명 중 두 명은 이 명령을 회피했고, 나머지 한 명만이 팔레즈로 도착 후 이를 거부했다고 하는데, 왕의 명령을 거부한 사절이 바로 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였습니다.
이 때 당시 후버트가 존 왕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가 “왕의 명예와 명성을 생각하고, 그가 곧 후회할 것이라 예상하여, 소년을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명령을 실행한 자는 평생 왕의 미움을 살 것이라 믿었다.”였으며, 이는 후버트가 존 왕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왕 존(King John)은 브르타뉴(Brittany)의 반군 세력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아서가 거세당하고 실명되었음을 소문을 퍼트렸으나, 아서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란은 더욱 격화되었고, 1203년경 아서는 루앙(Rouen)으로 이송하는 중 16세 나이에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아서가 살해당한 이후 존 왕은 윌리엄 드 브루즈(William de Braose) 가문에 혹독한 처벌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는 존 왕이 아서를 죽이고 윌리엄 드 브루즈가 살해하는것으로 치장해 처벌을 내리지 않았나 추측이 돌기도 했습니다.
1204년, 후버트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Philip II)의 공격에 맞서 시농(Chinon)의 방어를 맡았고, 그는 1년 가까이 버티다 1205년 여름 성벽이 무너지자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지만, 중상을 입고 2년간 포로로 잡혔지만 존 왕이 그의 몸값을 300마크로 책정해 지불하라고 명령하여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시농의 전투는 시농 공방전(Siege of Chinon)이라 불리우며,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노르망디(Normandy)및 앙주(Anjou)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격돌이였고, 잉글랜드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나 결국 프랑스가 승리한 전쟁이였습니다.
잉글랜드로 복귀한 후버트는 1207년 말 다시 관직과 토지를 축적해가며, 1208년에는 헌팅던(Huntingdon)의 래포드(Lafford) 성과 도시를, 이듬해에는 워메게이(Wormegay)의 여백작 비어트리스 드 바렌(Beatrice de Warenne)와 결혼하여 막대한 토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전 남편인 도운 바돌프(Doun Bardolf)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윌리엄 바돌프(William Bardolf) 외 후버트의 아들 존(John de Burgh)과 후버트(Hubert de Burgh the younger)를 낳았으며, 이들은 게인스버러 드 버그(Gainsborough de Burgh)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농 공방전 이후 1214년 프랑스 부빈(Bouvines)에서 다시 존 왕은 여러 세금으로부터 자금을 충당해 군사를 집결하고 동맹국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4세(Otto IV)과 함께 프랑스 필리프 2세(Phillipe II)와 다시 부빈 전투(Battle of Bouvines)를 벌였으나, 프랑스에 대패하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가 패배 후 후버트는 왕실 대리 집정(Seneschal)으로 임명되어 포아투(Poitou)에서 프랑스와의 휴전에 서명하고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이 때 , 존 왕의 입지는 급격히 추락했고, 오토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는가 반면 프랑스 필리프 2세는 유럽 최강 왕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라는 중세 잉글랜드 헌정사의 대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존 왕(John)의 실정에 반발한 귀족들과의 충돌이 최고조에 달한 때입니다. 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는 이 중요한 순간에서도 존 왕의 편에 서 있었고, 존 왕은 런던의 지지를 얻고자 후버트와 코번트리(Coventry) 주교를 사절로 보냈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존 왕의 신임을 받았던 후버트는 ‘포아투의 집정’으로 마그나 카르타에 이름을 올렸고, 곧바로 재무장관(Justiciar)으로서 잉글랜드 정국 운영에 핵심적인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고, 도버 성(Dover Castle)의 수장까지 오르게 됩니다.
✋잠깐! 마그나 카르다란(Magna Carta)? 1215년, 잉글랜드 왕 존(John)이 귀족들의 강요로 서명한 문서로, 중세 유럽 최초로 왕의 권력을 법적으로 제한하고 귀족들의 권리를 명문화한 헌장입니다. ‘마그나 카르타’는 라틴어로 ‘위대한 헌장(Great Charter)’을 뜻하며, 오늘날까지도 법치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문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당시 존 왕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귀족들과 교회에 무리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자들을 임의로 체포하거나 처벌했습니다. 이러한 폭정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무장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존 왕은 1215년 6월 15일, 런던 근처의 런이미드(Runnymede) 평원에서 이 헌장에 서명하게 됩니다. 마그나 카르타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왕이라 할지라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자유민은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체포되거나 재산을 박탈당할 수 없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의회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없으며, 교회의 자유와 귀족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이 헌장이 귀족의 권리를 지키는 데 초점을 둔 문서였지만, 그 핵심 정신인 ‘권력 제한’과 ‘법치’는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시민 전체의 권리 확대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비록 마그나 카르타는 그 해 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무효 선언되고 내전이 벌어졌지만, 이후 왕위에 오른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가 이를 여러 차례 재확인하면서 영국의 헌정 질서 속에 제도화되었습니다. 특히 “정당한 절차 없이는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조항은 훗날 영국 보통법의 근간이 되었고, 미국 독립 선언, 헌법, 프랑스 인권 선언 등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마그나 카르타는 단순한 중세의 정치 타협이 아닌, 왕권을 법으로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헌정주의의 시초로 평가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신은 점차 확산되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의 기틀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서입니다 |
존 왕 사후, 왕위는 그의 9세 아들 헨리 3세(Henry III)에게 이어졌고, 왕국은 후버트 드 버그, 윌리엄 마셜(William Marshal, 펨브룩 백작) 등의 충성파에 의해 수습되기 시작했습니다. 후버트는 존 왕 치하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다음 왕의 치세에서도 더 높은 위치로 나아가게 되나, 그 앞에 놓인 정치적 혼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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