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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왕국을 넘나든 여왕 앙굴렘의 이자벨(Isabelle of Angouleme) 1편

by deepedit 2025.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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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불리지도, 왕비의 삶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채 잉글랜드 왕 존의 첫번째 아내 글로스터의 이사벨라 이야기에 이어, 잉글랜드 왕 존의 아들, 헨리 3세(Henry III)를 낳은 앙굴렘의 이자벨(Isabelle Angouleme)에 대한 이야기를 두 번에 나누어 풀어보자 합니다.

 

앙굴렘의 이자벨, 출처:alamy

 

이자벨(Isabelle)은 앙굴렘 백작 오드마르(Audemar, Count of Angouleme)와 알리스 드 쿠르트네(Alice de Courtenay)의 외동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몽타르지(Montargis)와 샤토르나르(Châteaurenard)의 영주 피에르 드 쿠르트네(Peter de Courtenay)의 딸이자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오귀스트(Philip II Augustus)의 사촌이었습니다. 쿠르트네(Courtenay) 가문과 연이 있어 예루살렘(Jerusalem), 헝가리(Hungary), 아라곤(Aragon), 카스티야(Castile)의 왕실들과도 혈연관계가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왕 존(King John of England)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을 당시, 이자벨은 위그 9세 드 뤼지냥(Hugh IX de Lusignan)과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뤼지냥의 위그 9세의 인장, 출처:wikipedia

 

존 왕(King John)과의 결혼은 뤼지냥(Lusignan) 가문과 앙굴렘(Angoulême) 백작가 사이에 오랜 앙금을 끝낼 방법이자, 아키텐(Aquitaine) 인근 지역을 하나로 묶을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앙주(Anjou)의 아키텐 지배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아키텐을 둘로 나눌 수 있었기에 존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자벨의 아버지 오드마르 백작은 딸이 여왕이 될 수 있다면 뤼지냥과의 약혼을 파기할 수도 있다는 제안에 꽤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1200년 존 왕은 이자벨과 결혼하였고, 결혼 초기에는 어린 이자벨을 아내라기보다는 아이처럼 대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재정적으로도 철저히 의존했고, 왕궁에 없을 때는 말버러 성(Marlborough Castle)이나 존 왕의 첫 번째 아내 글로스터의 이사벨라(Isabella of Gloucester)의 윈체스터(Winchester) 저택에서 지냈으며, 존 왕은 이자벨 생계비로 연간 약 50~80파운드를 사용했습니다.

✋잠깐!

이자벨은 결혼 당시 부모로부터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하지 않았고, 앙굴렘 가문 자체가 작은 귀족 집안이라 재력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존 왕은 이자벨을 통해서 돈을 받아내려는 목적이 아닌 앙굴렘 영지를 확보하기 위핸 정치적 목적이 컸습니다.
그래서 존 왕은 이자벨에게 생계비를 주게 되었고, 사용 목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왕비도 역시 개인 시종과 궁정 운영을 위해 생계비가 필요했습니다.
2. 왕비 역시 왕궁에 거주가 아닌 외부에 거주 시 의식주, 시종, 장신구 등에 사용할 돈이 필요했습니다.
3. 왕비라 하여 국고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왕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앙굴렘 영지 위치(Charente), 출처:la charaente

 

1200년 말경 이자벨은 왕궁에 입궁하게 되었으며, 이자벨은 당시 존 왕의 횡포와 방탕한 생활 덕분에 군중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존 왕이 매일 아침 이자벨을 찾아가게 한다고 해서 군중들은 그녀를 마치 팜므파탈로 여겼습니다. 1207년 그녀는 첫 아이 헨리 3세(Henry III)를 시작으로 콘월의 리처드(Richard of Cornwall), 이자벨(Isabella), 조안(Joan), 그리고 엘리너(Eleanor) 총 5명을 낳았습니다.

 

헨리3세, 출처:wikipedia

 

존 왕이 사망한 1216년 이후에도 여전히 이자벨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홉 살의 아들 헨리(Henry III)가 새 국왕이 되었지만, 이자벨은 섭정 정부(regency)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자녀들과도 떨어져 지내며 자녀들의 양육이나 교육에 직접 관여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외로움을 느낀 이자벨은 곧바로 자신의 영지인 앙굴렘(Angoulême)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고, 1217년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이자벨은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다시 세우기 위해 4살의 딸 조안(Joan)을 라 마르슈(La Marche) 백작 위그 10세 드 뤼지냥(Hugh X de Lusignan)에게 약혼시켰습니다. 공교롭게도 위그 10세는 과거 이자벨이 약혼했던 위그 9세(Hugh IX)의 아들이었습니다.

 

뤼지냥 가문의 문장, 출처:wikipedia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1217년 이자벨이 딸의 약혼자였던 위그 10세와 딸의 약혼을 파기하고 직접 결혼했고, 조안에게 위그 10세는 약혼자에서 계부가 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자벨은 조안(Joan)을 인질로 잡아 잉글랜드로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조안을 인질로 잡게 된 주요 배경은 위그 10세가 이자벨과 결혼하며 조안과의 약혼이 파기됐지만 그래도 지참금은 잉글랜드로부터 받아야겠다 해서 조안을 인질로 잡게 되었고, 또한 이자벨에게 미지급된 생계비 또한 받아내기 위한 속셈이였습니다. 

 

이자벨은 아들 헨리 3세(Henry III)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위그 드 뤼지냥 경은 포와투(Poitou) 지역에서 자식도 없이 홀로 남아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은 우리 딸이 너무 어려 그와 혼인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상속인을 빠르게 얻을 수 있는 다른 아내를 두라고 권했고, 프랑스 여성과 혼인하라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다면, 포와투와 가스코뉴(Gascony)에 있는 폐하의 영지와 저희 땅은 모두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 같은 혼인에서 야기될 위험을 보고, 아무 조언도 받지 못한 채, 위그 백작을 저희 남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신께서는 저희가 폐하를 위해, 우리 자신보다 더 많이 생각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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