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왕의 혈통 브리트니의 아서(Arthur)와 브리트니의 엘리너(Eleanor)를 무참히 감금하고 살해했던 잉글랜드 왕 존(King John of England)의 왕비(사실 칭호는 붙지 못한) '글로스터의 이사벨라(Isabella of Gloucester)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사벨라는 글로스터 백작 윌리엄(William, 2nd Earl of Gloucester)과 그의 아내 호위즈(Hawise, 로버트 드 보몽(Robert de Beaumont, 2nd Earl of Leicester)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로, 공동 상속녀였습니다. 그녀는 이자벨 드 베르망두아(Isabel de Vermandois)의 증손녀이자, 와렌느 가문(Warenne)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그녀의 부계 혈통을 따라가면, 앙주 여제 마틸다(Empress Matilda)의 이복오빠이자 내전기인 '무정부시대(The Anarchy)'에서 마틸다를 지지한 이복오빠이자 장군인 글로스터의 로버트(Robert of Gloucester)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좀 이사벨라의 가계도가 복잡한 듯 합니다.
**무정부시대(The Anarchy)는 1135년부터 1153년까지 이어진 헨리 1세의 딸 마틸다(Empress Matilda)와 조카 스티븐 왕 사이의 왕위 계승 내전을 말합니다.
이사벨라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료에 따르면 1173년에서 1176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1176년 아직 요람에 있을 나이로 헨리 2세(Henry II)와 아키텐의 엘리너(Eleanor of Aquitaine)의 막내아들인 존(John)과 약혼하게 됩니다. 당시 9세였던 존을 이사벨라와 결혼시킬 목적으 헨리 2세가 막내아들 존에게 영지와 지위를 마련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결혼 계약에 따라 이사벨라의 아버지 글로스터 백작 윌리엄은 존을 자신의 상속인으로 인정했고, 이는 또한 윌리엄이 이사벨라의 두 언니들을 실질적으로 유산 상속에서 배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잠깐! 이사벨라의 아버지 글로스터의 윌리엄이 두 언니를 빼고 이사벨라에게만 유산을 주려 함은 왕실과의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함이였다고 합니다. 보다 상세한 이유를 찾아보면, 윌리엄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세 딸이 모두 공동 상속녀(co-heiresses)였다고 하며, 1176년 헨리 2세(Henry II)는 자신의 막내아들 존(John)의 장래(영지나 권력 부재를 채우기 위한)를 마련하기 위해 어린 이사벨라와 약혼을 추진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존은 막내 아들로 왕위 계승에서 가장 멀리 있었고, 뚜렷한 영지나 권력 또한 없었기 때문에, 영지를 수여할 방법이 필요했던 헨리 2세는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통해 글로스터 백작령을 존에게 넘기려 했던 것입니다. 즉, 헨리 2세는 글로스터 영지를 아들 존에게 주고 싶었고, 윌리엄 백작 역시 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했던게 서로 맞아 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
1183년 윌리엄이 사망하자, 그의 모든 영지가 이사벨라에게 넘어갔고 이후 존과의 결혼식은 존이 성인이 된 1189년에서야 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볼드윈(Baldwin)은 두 사람 모두 헨리 1세(Henry I)의 증손이기 때문에 근친혼에 해당한다고 하며 결혼에 반대했고, 둘이 부부로서 함께 지내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존은 교황의 면죄부를 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면죄부가 발급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과 이사벨라는 1189년 8월 29일, 윌트셔(Wiltshire)의 말버러 성(Marlborough Castle)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 생활은 10년간 이어졌지만, 행복하거나 원만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초기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움직이며 공동으로 문서(영지 기증, 종교 기관에 후원, 지방 권한 승인 등과 관련된 문서)에 서명하기도 했고, 1190~1191년경에는 노르망디(Normandy)도 함께 방문했습니다. 특히 공동으로 서명한 문서들은 존이 글로스터 백작 ‘jure uxoris’(아내의 권리를 통해 얻은 작위) 자격으로 이사벨라의 영지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문서에 이사벨라의 이름도 함께 명기되어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서로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끝내 자녀도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존은 아마도 여러 사생아들 '칠험의 리처드(Richard of Chilham), 웨일스의 부인 조안(Joan Lady of Wales) 등' 나았으며, 1193년에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Philip Augustus)와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그의 이복누이 알리스(Alys)와 결혼하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됩니다. 이는 명백히 이사벨라에 대한 거부 의사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1199년 4월 6일, 존은 형 리처드 1세(Richard I)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고 5월경 왕관을 썼지만, 이사벨라는 여왕으로서 함께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이는 존이 이미 결혼을 해소하려 했다는 증거로 보이며, 실제로 같은 해 8월 30일(결혼 10주년 하루 뒤) 또는 늦어도 1200년까지 존은 근친혼을 이유로 노르망디에 있는 리지외(Lisieux), 바유(Bayeux), 아브랑슈(Avranches)의 주교들이 이혼을 판결하였고, 이혼을 승인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존은 글로스터 영지를 계속 차지하기 위해 이사벨라를 14년간 왕실의 후견인 상태(royal wardship) 아래 두었습니다. 존이 나이 어린 새 왕비 이자벨 당굴렘(Isabelle d’Angoulême)과 재혼할 때 이사벨라는 그녀와 같이 윈체스터(Winchester)에 머물었다고 합니다. 두 여성은 존과 이자벨의 장남인 헨리 3세(Henry III)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합니다.
1214년, 이사벨라도 자신보다 16살 이상 어린 제2의 남편, 에식스 백작 제프리 드 맨더빌(Geoffrey de Mandeville)과 재혼하고, 그는 그녀와 결혼하며 그녀의 이름으로 글로스터 백작(jure uxoris)을 얻기 위해 무려 2만 마르크(현재 기준 최대 3억달러 이상에 달하는 당시 천문학적 금액이였음) 거금을 지불하려 했습니다만, 끝내 완납되지 않았고, 2년 뒤인 1216년, 런던에서 열린 마상시합 토너먼트에서 입은 부상으로 제프리 드 맨더빌은 사망하게 됩니다.
에식스 백작 제프리 드 맨더빌(Geoffrey de Mandeville)은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의 서약자 중 한 명이었지만, 당시 국왕 존(John)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기에, 그의 죽음과 동시에 모든 작위와 영지는 몰수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라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반왕파(바루니얼 반란 세력)를 지지했고, 더 이상 왕실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자유로운 미망인(free widow)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영지는 존 왕의 생전에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고, 존이 사망한 지 거의 1년이 지난 1217년 9월에야 비로소 이사벨라에게 공식적으로 반환됩니다.
이사벨라가 되찾은 영지는 브리스톨(Bristol) 부근 글로스터셔(Glouscestershire), 버크셔(Berkshire) 일부 영지, 햄프셔(Hampshire)의 피터스필드(Petersfield), 서섹스(Sussex), 서머셋(Somerset), 윌트셔(Wiltshire) 일부 지역 등을 반환받으며, 글로스터 백작부인의 자격으로 법적 소유권과 수익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1217년 10월, 이사벨라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을 합니다. 상대는 잉글랜드 수석 재판관이자 후에 섭정까지 지낸 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와 세 번째 마지막 결혼을 올리고, 결혼 몇 주 후(존의 죽음으로부터 거의 정확히 1년)에 원인 불분명한 채 사망하게 됩니다.
이사벨라는 잉글랜드 남부 켄트(Kent)의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에 묻혔고, 그녀의 햄프셔(Hampshire) 피터스필드(Petersfield) 영지 내 10파운드 상당의 토지를 캔터베리 수도승들에게 기부했습니다. 마지막 결혼에서도 자녀는 없었고, 그녀의 글로스터 백작위는 리처드 드 클레어(Richard de Clare)와 결혼한 이사벨라 언니 중 한 명의 아들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에게 이어졌고, 제 7대 글로스터 백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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