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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의 손녀, 왕좌를 빼앗긴 비운의 공주 ‘엘리너’의 진실

by deepedit 2025.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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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뉴 공작(Duke of Brittany)이자 헨리 2세(Henry II)의 아들인 조프루아 플랜태저넷(Geoffrey Plantagenet)과 그의 아내 브리타뉴 콘스탕스(Constance of Brittany) 사이에서 태어난 첫번째 딸 브리타뉴 엘리너(Eleanor of Brittany)는 약 1184년경 태어났습니다.

브리타뉴 엘리너, 출처:wikipedia

 

엘리너가 태어났을 무렵, 그녀의 아버지 조프루아는 그의 아버지 헨리 2세(Henry II)와 사이가 멀어져 있었고, 1186년 8월 파리에서 열린 토너먼트 도중 말에 밟혀 사망했습니다.

 

✋잠깐!

1186년 8월 파리에서 열린 토너먼트에서 조프루아 플랜태저넷(Geoffrey Plantagenet)이 사망한 경기는, 당시 중세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던 기사들의 토너먼트(jousting or melee tournament)였으며, 정확히 어떤 경기 방식이었는지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개인 창 시합(joust) 또는 집단 근접전(melee) 형식의 경기 중 하나였으며,
  • 조프리는 말에서 떨어진 뒤 다른 기사의 말에 밟혀 치명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 이 경기는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열린 왕실급 토너먼트로, 당대 왕족과 고귀한 기사들이 정치적, 군사적 명성을 얻기 위해 참여하던 매우 위험한 행사였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로 보기도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조푸루아가 당대 권력 구도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여서 정치적 암살로 사망에 이른건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엘리너는 그 아름다움으로 "브리타뉴의 진주(Pearl of Brittany)", "고운 아가씨(Fair Maid)", "브리타뉴의 미녀(Beauty of Brittany)"라 불렸습니다. 그녀는 헨리 2세와 아키텐 엘리너(Eleanor of Aquitaine)의 손녀이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녀 중 장녀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둘째 딸 마틸다(Matilda)가 태어났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셋째는 아서(Arthur)로, 훗날 1203년 존 왕(King John)에 의해—혹은 그의 명령으로—살해당하게 됩니다. 1187년 아서가 태어나면서 엘리너의 결혼 시장에서의 가치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어머니처럼 브리타뉴를 지참금으로 가져올 수 없는 위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왕가의 공주들처럼 엘리너도 정략결혼의 길을 걷는 듯 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뒤, 엘리너의 법적 보호자가 된 리처드 1세(Richard I)는 여동생 조안(Joan)이 완강히 거절하자, 대신 엘리너를 제3차 십자군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외교 카드로써 살라딘(Saladin)의 형제 알 아딜(Al-Adil)에게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홉 살이 된 엘리너는 오스트리아의 공작 레오폴트 6세(Leopold VI)의 아들 프리드리히(Friedrich)와 약혼하게 됩니다. 이는 리처드 1세가 레오폴트에게 붙잡힌 뒤, 그의 석방을 위한 몸값 협상에서 포함된 조건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 출처:wikipedia

 

엘리너는 볼드인 드 베튠(Baldwin de Béthune)의 보호 아래 독일로 향하던 중, 레오폴트 공작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프리드리히는 이 결혼에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엘리너 일행은 다시 귀국하게 됩니다. 이후 1195년과 1198년에도 프랑스 왕 필리프 2세(Philip II)의 아들 루이(Louis)와 부르고뉴 공작 오도(Odo)와의 혼담이 거론되었지만,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어머니 콘스탕스 공작부인(Duchess Constance) 엘리너는 손녀 엘리너가 왕가의 보호에서 벗어나길 원했고, 리처드 1세가 죽은 1199년 무렵, 엘리너는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1200년대 초, 동생 아서가 새 왕 존(John)에 대항해 반기를 들면서 크게 바뀌게 됩니다. 아서는 사망한 조프루아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로서 왕위 계승에 강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삼촌 존(John)에게 밀려났습니다. 그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는 그의 입장에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아서는 1202년 8월 1일, 그의 할머니 아키텐의 엘리너가 머물던 미르보(Mirebeau)성을 포위하던 중 포로로 붙잡혔고, 엘리너 역시 같은 시기 체포되거나 곧이어 붙잡혀, 결국 아서 및 엘리너 모두 감금되게 되었습니다. 아서는 팔레즈(Falaise) 감금 후 루앙(Rouen)에 이감되었고, 엘리너는 영국으로 보내져 됩니다. 그녀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감금된 왕족이라는 슬픈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잠깐!

엘리너의 동생 아서가 감금된 이유는,

리처드 1세가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 계승권은 두 사람  '아서(Arthur) 즉 리처드 1세의 동생 조프루아의 아들이자 헨리 2세의 손자'와 리처드 1세의 남동생' 중 존(John)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때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아서의 권리를 지지했고, 아서는 프랑스 측의 후원을 받으며 잉글랜드, 노르망디, 앙주 등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1202년, 아서는 프랑스 왕과 함께 존 왕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고, 앙주 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켯습니다. 그러나 1202년 8월, 미르보(Mirebeau) 전투에서 존 왕이 기습을 감행하여 아서를 포로로 잡습니다. 아서는 처음엔 팔레즈(Falaise)에 수감되었다가 곧 루앙(Rouen)으로 이감됐고, 이후 1203년 4월경,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 왕이 아서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이는 존의 평판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후 프랑스 내 영지 대부분을 잃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서의 누나 엘리너 또한 감금된 이유는 바로 왕위 계승권 문제였습니다. 그녀의 혈통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평생 감금되었고, 그녀는 아서의 누이이자 헨리 2세의 손녀로서, 플랜태저넷 왕가에서 존 왕과 헨리 3세에 이르기까지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아서가 죽은 이후 그녀
는 리처드 1세와 존 왕의 조카로서, 오빠 아서가 죽은 뒤 브르타뉴 공국과 영국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 존 왕이 아서를 죽였다는 의혹이 돌면서, 그 다음 순위였던 엘리너는 더욱 민감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엘리너를 브르타뉴 통치의 상징으로 삼으려 하자, 존 왕은 그녀를 철저히 격리시켰습니다. 헨리 3세도 역시 그녀를 석방하지 않은 이유는, 엘리너를 통해 왕위 정당성에 도전할 수 있는 귀족들이 많아 본인의 왕권에 많은 위협을 느꼈다고 합니다.

 

만약 당대에 장자 상속법(primogeniture)이 철저히 지켜졌다면, 아서 사후 왕위는 엘리너에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는 존과 그의 아들 헨리 3세(Henry III) 모두가 결코 잊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세대 전, 엠프러스 마틸다(Empress Matilda)가 스티븐 왕(King Stephen)과 왕위를 두고 벌였던 내전(1135~1154년)은 여성 통치자에 대한 거부감을 강화시켰고, 이 때문에 엘리너는 결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녀가 결혼하게 된다면, 그 남편은 왕위를 주장하거나 궁정 내에서 반대 세력의 중심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은 그녀를 감금함으로써 그런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자 했습니다. 1208년 5월 27일, 존 왕은 그녀에게 리치먼드 백작부인(Countess of Richmond)의 칭호를 부여했지만, 헨리 3세는 1219년에 이 칭호를 회수해 다른 이에게 넘깁니다. 그 이후 엘리너는 단지 ‘왕의 친척(the king’s kinswoman)’ 혹은 ‘우리의 사촌(our cousin)’이라 불릴 뿐이었습니다.

 

브리니 공작의 영지 위치(현 프랑스 Bretagne(브르타뉴) 지역) , 출처: wikipedia

 

그녀는 1214년 존 왕과 함께 라로셸(La Rochelle)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존은 엘리너를 통해 브리트니의 지지를 얻으려 했고, 그녀의 이복동생 앨리스(Alice)를 대신해 꼭두각시 공작부인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앨리스는 콘스탄스가 세 번째 남편 기 드 투아르(Guy of Thouars)와 사이에서 낳은 딸로, 프랑스 왕 필리프의 사촌인 피에르 드 드뢰(Peter of Dreux)와 결혼해 브리트니 공작이 되었습니다. 존은 회유와 협박을 병행해 피에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피에르는 굴복하지 않았고, 낭트(Nantes) 전투에서 맞서 싸웠습니다. 결국 그의 형이 붙잡히면서 정전이 이뤄졌고, 존은 브리트니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앙제르(Angers)로 진군했습니다. 엘리너를 복위시키려던 계획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엘리너의 생활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경호도 삼엄했지만, 감금은 엄격하지는 않았습니다. 1230년에는 시녀 두 명과 함께 지내며 자수를 놓을 천과 자선을 위한 돈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왕의 가장 고급 천은 제공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스와팜(Swaffham) 영지와 사슴 고기를 하사받았고, 왕실 가족과 스코틀랜드 왕의 딸들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당당하게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존 왕 치하에서 쓴 유일한 생존 편지(1208년)에서 그녀는 ‘브리트니 공작부인 겸 리치먼드 백작부인(Duchess of Brittany and Countess of Richmond)’으로 서명했습니다. 그녀는 귀족적인 식단을 유지했으며, 매주 식료품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식품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 월요일: 쇠고기, 돼지고기, 꿀, 식초
  • 화요일: 돼지고기, 달걀, 왜가리 고기
  • 수요일: 청어, 장어, 가자미, 아나고, 아몬드, 달걀
  • 목요일: 돼지고기, 달걀, 후추, 꿀
  • 금요일: 아나고, 가자미, 장어, 청어, 아몬드
  • 토요일: 빵, 에일, 가자미, 아몬드, 버터, 달걀
  • 일요일: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달걀

엘리너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에 감금되어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녀는 코프 성(Corfe), 버러 성(Burgh), 보우스 성(Bowes) 등 다양한 요새에 수감되었습니다. 1221년에는 구조 시도가 있다는 정보로 인해 해안 근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고, 말버러(Marlborough)와 글로스터(Gloucester)에서도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1241년에는 브리스톨 성(Bristol Castle)에 수감되었으며, 당시 자주 관리들의 방문을 받아 안부를 확인받았습니다. 그녀는 사제와 시녀들을 곁에 둘 수 있었고, 약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녀는 39년의 감금 생활 끝에, 죽음을 통해서만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브리스톨 성, 출처: wikipedia

 

처음에는 브리스톨의 세인트 제임스 수도원(St James’s Priory Church)에 묻혔으나, 이후 왕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 에임즈버리(Amesbury) 수도원으로 유해가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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