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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배신과 피로 물든 왕관의 주인공: 헨리 2세

by deepedit 2025.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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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멀린 드 와렌(Hemalin de Warren)에 연관된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 그리고 헨리 2세(King Henry II)를 배신한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헨리 2세와 토머스 베켓, 출처: wikipedia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은 원래 헨리 2세의 절친한 친구이자 충실한 조언자였습니다. 헨리는 베켓을 1162년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에 임명함으로써 교회를 왕권의 통제 아래 두려 했습니다. 당시 왕과 교회는 권력의 중심지로서 서로 긴장 관계에 있었고, 헨리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베켓은 대주교가 된 뒤부터 더욱 교회의 권위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고, 왕의 명령에 반발했습니다.

 

특히, 헨리 2세가 1164년에 발표한 ‘성직자 재판법(Constitutions of Clarendon)’은 왕이 교회 성직자에 대한 사법권을 갖겠다는 강력한 선언이었는데, 베켓은 이를 거부하며 교황과 협력해 왕의 권력 확대를 막으려 했습니다.

 

토마스 베켓과 함께 있는 헨리 2세, 출처:wikipedia

 

베켓과 헨리 2세의 갈등은 심화되어 베켓은 결국 1164년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당시 교황이 베켓을 보호했고, 헨리 2세는 그의 권위에 도전받는 상황이 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1170년에 베켓이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왕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헨리 2세가 분노하여 “내가 그 놈을 죽이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네 명의 기사들이 캔터베리 대성당에 침입하여 베켓을 살해하는 극단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살해 사건은 중세 유럽 사회에서 충격적인 일이었고, 왕권에 대한 교회의 반발과 민심의 동요를 불러왔습니다.

 

베켓의 죽음은 헨리 2세에게 깊은 정치적, 종교적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베켓은 곧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교회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분노 발언이 살인을 야기했다는 여론의 압박과 교황청의 압력에 의해 공개 참회에 나섰습니다. 1174년, 헨리 2세는 캔터베리 대성당을 찾아 맨발로 걸어가 300회에 가까운 채찍질을 당하며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 참회는 그의 정치적 위기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토머스 베켓 무덤 앞에서 참회하는 헨리 2세, 출처: wikimedia

 

베켓의 죽음에 더불어 헨리 2세의 권력 집중과 통치 방식에 많은 불만을 품은 헨리 2세의 아내 엘리너 드 아키텐(Eleanor of Aquitaine)는 베켓 살인에 분노한 여러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특히, 그녀의 아들 헨리(Henry)는 그에게 딸린 여러 기사들에 대한 통치를 높이기 위해 선조의 유산을 사용하려 했으나, 헨리 2세가 첫째 아들 헨리가 받을 세 개의 성을 막내아들 존(John)에게 물려주게 되자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동생 리처드(Richard)와 함께 대반란(The Great Revolt)을 일으키게 됩니다. 

 

헨리 2세의 왕비 Eleanor, 출처:wikipedia

 

셋째 아들 제프리(Geoffry)의 경우 공작위 계승자로 약혼한 상태라 프랑스에 있었고, 후에 대반란에 참여하게 됩니다. 반면, 막내 아들 존(John)은 나이가 어려 대반란에 동참하지 못하고 아버지 헨리 2세와 함께 왕궁에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1173년부터 1174년까지 벌어진 대반란에서 이들 가족 구성원들은 프랑스 왕 필립 2세의 지원을 받아 헨리 2세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에서 엘리너는 아들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동했으며, 헨리 2세와 대립했습니다. 왕가 내에서 아내와 아들들이 직접 반기를 든 이 사건은 헨리 2세에게 큰 배신감과 정치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헨리 2세는 반란을 진압한 후 아내 엘리너를 감금했습니다. 그녀는 약 16년간 투옥 상태로 지내며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고, 왕실 내 여성으로서의 위상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반면 아들들에 대해서는 용서를 베풀었는데, 왕위 계승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 헨리는 1183년에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왕위 계승 구도는 둘째 아들 리처드와 막내 존에게 넘어갔습니다.

 

리차드 1세, 출처: wikipedia

 

헨리 2세 사후, 왕위는 1189년에 리처드 1세에게 넘어갔습니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에 적극 참여한 용맹한 군주로 유명하며, 헨리 2세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아 잉글랜드를 다스렸습니다. 리처드 1세가 1199년에 사망한 후에는 막내 존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존 왕은 헨리 2세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왕위를 차지한 인물로, 그의 통치는 여러 문제와 분쟁을 야기했으며 잉글랜드 역사에서 복잡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지막 아들 존,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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