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1년 9월, 스티븐 왕(King Stephen)은 그의 충성스러운 군사령관 윌리엄 이프로(William of Ypres)와 그의 아내 마틸다 블르뉴 여왕(Queen Matilda of Boulogne)의 꾸준한 군사·외교 활동 덕분에 브리스톨 성(Bristol Castle)에서 석방되었는데, 그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해 여름,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Matilda of Boulogne)는 적극적으로 군을 이끌어 남편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윌리엄 이프로는 기동력 있는 기병대를 활용해 엠프러스 마틸다(Empress Matilda) 측 병력을 포위·분쇄하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엠프러스 마틸다 측의 핵심 지휘관이었던 로버트 글로스터(Robert of Gloucester)가 윈체스터 전투(Rout of Winchester)에서 스티븐 측 잔여 병력과 동맹군의 반격에 의해 참패하게 됩니다. 이후 로버트 글로스터는 후퇴 도중 포위망에 갇혀 사로잡혔으며, 이는 내전의 주도권을 다시 스티븐 측으로 가져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결국 양측은 포로 교환 협상에 돌입하였고, 스티븐과 로버트를 맞바꾸는 조건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로써 엠프러스 마틸다(Empress Matilda)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 시도는 사실상 좌절되었으며, 권력 균형은 다시 스티븐 쪽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전 자체는 종식되지 않았고, 이후 몇 년간 양측의 세력 다툼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스티븐(Stephen)의 석방 이후 내전은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티븐은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1142년 초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 머물고 있던 엠프러스 마틸다(Empress Matilda)를 몰아냈고, 마틸다는 곧바로 템스강(River Thames)과 체르웰강(River Cherwell)으로 둘러싸이고 두터운 성벽을 가진 요새 도시 옥스퍼드(Oxford)로 이동하여, 그곳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 세력을 재정비했습니다.
1142년 9월, 스티븐은 마틸다를 완전히 제압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이끌어 옥스퍼드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이 공격은 마틸다 측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녀와 소수의 측근 병력은 급히 옥스퍼드 성(Oxford Castle)으로 피신했습니다. 스티븐은 성 주변을 완전히 봉쇄하고, 약 3개월에 걸쳐 포위전을 벌였습니다. 병참로가 차단된 성 안에서는 식량과 물자가 급격히 고갈되었고, 한겨울의 혹한은 수비군의 사기를 심각하게 떨어뜨렸습니다.
스티븐은 옥스포드 성의 함락이 임박했다고 믿었으며, 이 승리를 통해 마틸다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왕위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 저녁, 마틸다 황후(Empress Matilda)는 옥스퍼드 성(Oxford Castle)에 대한 포위망을 뚫기 위해 눈빛과 구분되지 않는 흰색 외투를 걸치고 성벽을 빠져나가는 과감한 탈출을 감행했고, 그녀는 신뢰하는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얼어붙은 템스강(River Thames)을 조심스럽게 건너, 추격을 피하며 글로스터(Gloucester) 방면의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스티븐이 기대했던 결정적 승리는 물거품이 되었고, 내전은 다시 장기전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마틸다의 탈출이 알려진 다음 날, 옥스퍼드 성의 수비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티븐(Stephen)에게 항복했고, 스티븐은 이 승리를 통해 전쟁을 종결짓기를 바랐으나, 마틸다는 여전히 건재했고, 내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양측은 장기간에 걸친 간헐적 전투와 소모전을 이어갔으며, ‘무정부시대(The Anarchy)’로 불린 이 혼란은 10여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1148년, 마틸다는 잉글랜드에서 세력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노르망디(Normandy)로 귀환했습니다. 스티븐은 왕위를 유지했지만, 내전의 상처는 깊게 남았고, 왕위 계승 문제는 여전히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되었습니다.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양측은 우위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엠프러스 마틸다(Empress Matilda)는 세력 결집과 왕위 계승권 강화를 위해 아들 헨리 플랜태저넷(Henry Plantagenet, 훗날 헨리 2세)을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불러들였습니다. 헨리는 젊었지만 이미 노르망디(Normandy)와 앙주(Anjou) 일대를 상속받아 강력한 군사·재정 기반을 갖추고 있었고, 그의 귀환은 마틸다 세력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1153년 초, 스티븐(Stephen)은 여전히 잉글랜드의 국왕이었지만, 그의 권력은 이미 내전 장기화로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1139년부터 이어진 ‘무정부시대(The Anarchy)’ 동안 왕국 곳곳에서는 귀족들이 사실상 독립적으로 행동했고, 왕의 통제권은 런던과 남동부 일부 지역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스티븐은 장남 유스터스(Eustace)를 왕위 후계자로 세워 왕조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153년 여름, 유스터스(Eustace)가 갑작스레 병사로 사망하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후계자를 잃은 스티븐은 정치적 명분을 크게 상실했고, 장기화된 전쟁에 지친 귀족들과 교회는 더 이상 무력 충돌이 아닌 평화를 원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 교회는 전쟁이 불러온 농업 붕괴, 기근, 무역 침체를 심각하게 우려하며 조속한 종전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헨리 플랜태저넷(Henry Plantagenet)은 이미 노르망디(Normandy)와 앙주(Anjou), 아키텐(Aquitaine, 엘리너와 결혼 후 확보한 영지)를 포함한 광대한 영지를 손에 넣어 막강한 군사·재정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내에서도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했고, 잉글랜드 원정에서 기동력과 지휘력을 발휘해 스티븐의 군사적 대응을 번번이 무력화시켰습니다. 스티븐은 헨리를 완전히 제압할 현실적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군사 환경 속에서, 스티븐은 더 이상의 내전이 왕국과 왕조 모두를 파멸시킬 것이라 판단했고, 그는 헨리와 협상 테이블에 앉아 1153년 월링퍼드 협정(Treaty of Wallingford)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에서 스티븐은 생전에 왕위를 유지하는 대신, 자신의 사후 헨리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이는 스티븐이 군사적 패배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으로는 헨리를 후계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사실상 권력 승계를 보장한 타협이었습니다.
월링퍼드 조약(Treaty of Wallingford)에 따라 스티븐은 헨리(Henry)를 새로운 왕으로 임명했고, 1154년 10월 스티븐이 사망하자 헨리는 플랜대저넷 왕조의 첫 번째 왕인 헨리 2세(Henry II)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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