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 England

리처드 1세(Richard I) 2편, 아버지를 죽게 한 잉글랜드의 패륜아

by deepedit 2025. 8. 22.
반응형

아들들의 대반란(The Great Revolt)에 이어 형제간의 격전을 겪은 헨리 2세(Henry II) 그리고 그의 아들 헨리(Henry)가 죽고 왕위 계승자로 오르자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잉글랜드의 패륜아 리처드(Richard)의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리처드(Richard)는 형 헨리(Henry)의 죽음 이후 헨리 2세(Henry II)의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었고, 잉글랜드(England), 노르망디(Normandy), 앙주(Anjou)라는 핵심 영토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세 지역은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묶여 왕위 계승에서 분리할 수 없는 핵심 영토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곧 선대 노르만 왕조가 물려준 기반일 뿐 아니라, 프랑스의 침공을 막아내는 중요한 방어선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가 상속받은 프랑스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붉은색 지역), 출처:wikipedia

 

 

그러나 헨리 2세(Henry II)는 여전히 리처드(Richard)를 신뢰하지 않았고, 세 지역 중 아키텐(Aquitane)을 막내아들 존(John)에게  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키텐은 리처드가 처음 공작 작위를 받은 지역이자 그의 성장기와 기사(Knight) 정체성이 형성된 영토였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리처드(Richard)는 헨리 2세(Henry II)에 대한 불신과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King Philip II of France)와 동맹을 맺으려 했고, 1188년 리처드는 프랑스 내 모든 잉글랜드 영토(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등)는 필리프 2세의 권위에 있다며 봉신 서약을 맺고(물론 필리프 2세의 부하가 목적이 아닌 헨리 2세를 겨낭한 전략 중 하나였습니다.), 1188년말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해 아버지의 영토 노르망디(Normandy)와 앙주(Anjou)를 공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초상화, 출처:Parisfortheholidays

 

1189년 초, 리처드(Richard)는 아키텐에서, 필리프 2세(Philip II) 역시 파리에서 병력을 소집해 투렌(Touraine)에 있는 투르(Tours) 지역으로 집결해 헨리 2세(Henry II)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투르(Tours)는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들은 르망(Le Mans)에서 헨리 2세와 다시 2차 격전을 벌였고 헨리 2세가 패하며 소뮈르(Saumur)까지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헨리 2세의 몰락을 결정짓는 전투가 되었습니다.

 

반면 노르망디의 루앙(Rueon)은 세느강(Senie River)과 고대 로마 시대때부터 지어진 강력한 도시로 필리프 2세의 장기간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소뮈르(Saumur)로 후퇴한 헨리 2(Henry II)세는 체력과 건강 약화로 병세가 심해져 시농(Chinon)으로 이동했으나, 결국 1189년 7월 6일 56세 나이로 생을 마치고 시농 근처 퐁트브로 수도원(Fontevraud Abbey)에 안장 되었습니다.

 

프랑스 시농 근처에 있는 헨리 2세가 안장된 퐁트브로 수도원, 출처:wikipedia

 

1189년 7월 20일, 헨리 2세(Henry II)의 서거로 리처드(Richard)는 노르망디 공작령을 계승하고, 이어 9월경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여 공식적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본토 노르망디, 앙쥬, 아키텐를 통합하며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의 왕 리처드 1세(Richard I)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 1세(Richard I)는 앙주 제국의 왕이 되었음에도 제국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1187년 십자군이 통치하던 예루살렘을 이집트 및 시리아의 통치자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 살라딘(Saladin)이 점령하며 유럽을 강타시킨 제 3차 십자군(The Third Crusade) 전쟁이었고, 리처드 1세는 어린 시절부터 기사(Knight)로서의 명성을 쌓아온 만큼 이 원정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겼습니다. 

 

즉위 후 리처드 1세(Richard I)는 십자군 지원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례 없는 규모의 재정 조치를 단행했는데, 왕실 보물을 처분하고, 관직·봉토·특권을 매각했으며, 셰리프직(Sheriffdoms)까지 판매하여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리처드 1세가 이것 저것 잉글랜드의 모든 것들을 팔아재끼다 보니 당시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는 “리처드 1세는 런던이라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습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2세(Philip II) 역시 십자군 서약을 했기 때문에, 리처드 1세는 일단 대륙 영토 방어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며 원정을 준비했으나 경쟁과 불신으로 인해 원정길에서 서로 격화되기도 했습니다.

 

1190년, 리처드 1세(Richard I)는 전 세계의 눈과 기대가 집중된 가운데 제3차 십자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는 마르세유(Marseille)와 제노바(Genova)에서 선박을 모아 거대한 함대를 조직했고, 수천 명의 기사와 병사, 그리고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물자를 실어 성지를 향한 장엄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원정길의 첫 기착지였던 시칠리아(Sicily)에 도착했을 때, 리처드는 예상치 못한 난관과 맞닥뜨렸습니다. 시칠리아 왕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복잡한 권력 문제로 인해 계획은 지연되었고, 그는 자신의 원정이 단순한 항해가 아니라 정치적 기로 속에 놓인 위험한 여정임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1189년, 시칠리아 국왕(King of Sicily) 윌리엄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독일 황제로 불린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Henry VI)는 자신의 아내 콘스탄스(Constanza, 윌리엄 2세의 숙부 로저 2세의 딸)를 근거로 시칠리아 왕위 계승자로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시칠리아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렉체 탕크레드(Tancred of Lecce)를 시칠리아 국왕으로 세웠습니다. 탕크레드는 왕위의 정통성이 약했기 때문에 외세의 개입에 민감했으며, 특히 리처드 1세(Richard I)의 동생 조안(Joan)을 감금하고 그녀의 지참금을 지급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시칠리아 왕 탕크레드, 출처:wikimedia

 

이에 리처드 1세는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1190년 10월 4일, 그는 시칠리아의 수도 메시나(Messina)를 공격해 점령했습니다. 도시를 함락시키면서 리처드 1세의 군사력이 탕크레드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탕크레드를 협상에 나서게 만드는 압력이 되었습니다. 결국 1191년 초, 메시나 조약(Treaty of Messina)이 체결되었고, 리처드 1세는 동생 조안을 석방하고 지참금을 돌려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탕크레드를 시칠리아의 합법적인 국왕으로 인정하게 했습니다.

 

동시에 리처드 1세(Richard I)는 장래 왕위 계승 문제를 고려해, 동생 조프루아의 아들이자 어린 조카 브르타뉴 공작 아서(Arthur of Brittany)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를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시키는 조항을 포함시켰습니다. 이 결정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와 그의 지지 세력에게 모욕으로 여겨졌으며, 리처드 1세의 동생 존(John)에게도 정치적 불만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훗날 존은 아서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한 부분에 대해 필리프 2세와 결탁해 리처드 1세에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됩니다.

 

시칠리아에서의 체류를 마친 리처드 1세(Richard I)는 1191년 봄 다시 출항했습니다. 항해 중 폭풍우로 인해 그의 함대는 분산되었고, 일부 선박은 사이프로스(Cyprus) 근처에 표류했습니다. 당시 사이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출신의 반역자 이사키오스 콤네노스(Isaac Komnenos)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리처드 1세의 병사들과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리처드 1세는 즉시 군사 행동에 나섰고, 1191년 5월 리마솔(Limassol)에서 이사키오스를 격파하고 섬 전체를 장악했으며, 이는 십자군의 중요한 보급 기지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튀르키에 밑 지중해에 있는 사이프로스, 출처:businessinsider

 

리마솔(Limassol)에 머무는 동안, 리처드 1세(Richard I)는 나바라(Navarre) 왕의 딸 나바라 베렝가리아(Berengaria of Navarre)와 전략적 혼인을 치렀는데, 사실 나바라는 피레네 산맥(Pyrenees Mountains)을 사이에 둔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를 견제할 수 있는 외교적 이점이 있었습니다. 혼인식은 리마솔에서 열렸고 베렝가리아는 훗날 잉글랜드 역사상 성지 즉 예루살렘 근처에서 결혼식을 올린 유일한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 피레네 산맥 밑에 있는 나바라, 출처:britannica

 

그 후 리처드 1세(Richard I)는 본격적으로 제 3차 십자군 전쟁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1191년 6월 8일 마침내 이스라엘 북부 아크레(Acre)에 도착해 이미 포위 중이던 십자군과 합류했습니다. 리처드 1세의 도착은 제 3차 십자군의 전세를 바꾸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