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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리처드 1세(Richard I) 1편, 자식들의 봉기로 수모를 겪은 헨리 2세

by deepedit 2025.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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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심장을 가진 왕이라 불렸던 리처드 1세(Richard I)는 헨리 2세(Henry II)와 아키텐 엘리너(Eleanor of Aquitaine)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의 초상화, 출처:wikipedia

 

잠깐 헨리의 자녀들에 대해 간략히 삶을 살펴보면, 

 

  • 윌리엄(William1153)
    장남으로 태어난 윌리엄은 세 살 무렵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헨리(Henry, 1155)
    아버지 헨리 2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왕위 계승 안정성을 위해 1170년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동 왕으로 즉위 받았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주어지지 않아, 불만을 품고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아들 중 하나 입니다. 1173년경 아버지를 대상으로 왕자들의 반란(Revolt of the Young King)을 일으켰고, 어머니 엘리너와 프랑스 왕 루이 7세까지 가담했지만, 반란은 실패했고, 헨리는 이후 방탕한 생활과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 1183년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리처드(Richard, 1157)
    헨리 2세의 3번째 아들로 제3차 십자군 원정(The Thrid Crusade)을 이끌며 군사적 재능을 보인 인물이였습니다. 형 헨리와 함께 반란에 동참했으나 패배 후 형이 죽고 왕위 계승자로 올랐으나, 여전히 아버지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의 내전속에 헨리 2세가 1189년에 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 조프루아(Geoffrey, 1158)
    브르타뉴 공작의 상속녀 콘스탕스(Constance of Brittany)와 결혼하여 브르타뉴 공작을 받게 되었고, 아버지와의 갈등 이어 형들과의 갈등이 이어진 가운데 마상시합에서 죽고 맙니다. 그의 아들 아서(Arthur)는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가 전사 후 헨리 2세의 막내아들 존과의 왕위 계승을 두고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물론, 잘 알려진 브루타뉴의 진주, 딸 엘리너 역시 비운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 엘리너(Eleanor, 1161)
    다섯째 엘리너는 현 스페인의 북중부 지역이였던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8세(Alfonso VIII of Castile)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왕비가 되었고, 이후 그녀의 딸 카스티야 블랑카(Blanche of Castile)는 훗날 프랑스 왕 루이 8세(Louis VIII)의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 53세 즈음에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조안(Joan, 1165)
    여섯째 조안은 현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섬 시칠리아의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of Sicily)와 혼인하여 시칠리아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 사후 그녀는 현 프랑스 남부에 있는 툴루즈 백작과 재혼 후 34세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존(John, 1166)
    막내 존은 형 조프루아의 아들 아서(Arthur)와 왕위 계승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감금 중 사망하며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으며, 귀족들과의 갈등 속에 왕권 제한과 귀족, 시민들도 법치 기반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게 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조약에 동의한 왕이 되었습니다.

 

리처드(Richard)는 11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 엘리너(Eleanor)의 상속령인 아키텐(Aquitaine)을 물려받았고, 1172년 푸아티에(Poitiers)에 있는 푸아티에 성(Palais des comtes de Poitou)에서 아키텐 공작으로 공식 즉위했습니다.

 

리처드가 아키텐 공작 작위를 받은 푸아티에 성, 출처:wikipedia

 

어린 시절부터 기사도와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리처드(Richard)는 특히 아키텐 북부 푸아투(Poitou)와 아키텐 남부 가스코뉴(Gascony)의 반항적인 귀족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헨리 2세(Henry II)에게 순종적이지 않았고, 효심이나 장기적 정치 감각, 그리고 행동에 대한 책임감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1173년, 리처드(Richard)는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에 반기를 드는 ‘대반란(The Great Revolt)’에 가담했습니다. 이 반란은 형 헨리(Henry), 동생 조프루아(Geoffrey), 그리고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William I of Scotland)과 프랑스 왕 루이 7세(Louis VII of France)까지 연합한 대규모 봉기로 발전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킨 주요 원인으로 헨리 2세(Henry II)의 통치 방식에 대한 모두의 불만이었습니다. 둘째 헨리(Henry)의 경우 아버지와 공동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마땅한 권력도 국정을 다스릴 기회도 주지도 않아 명목 상 왕이었지, 매우 굴욕적이었다고 합니다. 셋째 리처드(Richard) 역시 아키텐 공작을 얻긴 했으나, 실질적인 아키텐의 재정, 군대는 모두 헨리 2세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이 또한 무늬만 공작인 셈이었습니다. 넷째 조프루아(Geoffrey) 역시 브르타뉴 공작령을 받긴 했지만 리처드와 동일하게 아무런 권한도 권력도 있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왕 루이 7세(Louis VII of France)의 경우, 헨리 2세를 견제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마침 루이 7세의 딸 마가렛(Magarete)의 남편이 헨리 2세가 반란을 준비함을 듣고 반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William I of Scotland)의 경우, 노섬벌랜드 등 잉글랜드 북부 지역을 되찾길 바랬고, 다른 여러 영주들도 동참하며 봉기가 매우 커지게 되었습니다.

 

초기 반란이 시작할 무렵, 1173년 7월까지 아들 헨리(Henry) 중심의 반군들은 오말(Aumale), 느프 마르쉐(Neuf Marche), 베르뇌유(Verneuil)를 포위하고 브리타뉴의 돌(Dol de Bretagne)을 점령하며 루이 7세와의 동맹은 초기에 성공적이었습니다.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브르타뉴 돌, 출처:FranceGeo

 

리처드(Richard)는 푸아투(Poitou)로 이동하여 자신과 어머니에게 충성하는 남작들을 모아 아버지 헨리 2세의 지지자들에 대한 반란을 이끌었으나, 헨리의 어머니 엘리너(Eleanor)가 헨리 2세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리처드는 혼자 아키텐(Aquitaine)에서 헨리 2세의 지지자들과 맞서 싸야 했습니다. 그는 라 로셸(La Rochelle)을 점령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거부로 실패하고, 생트(Saintes)로 철수하여 이곳을 작전 기지로 삼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헨리 2세(Henry II)는 반란에 맞서기 위해 높은 비용으로 소집된 2만 명 이상의 용병으로 베르뇌이유(Verneuil)를 향해 진군했고,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군대 조직을 보고 철수했습니다. 이를 통해 헨리 2세의 군대는 브리타뉴의 돌(Dol de Bretagne) 지역을 재점령하고 브리타뉴를 평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평화 제안하며 협상하려 했으나 루이 7세로 인해 저지 당해 헨리 2세 생트(Saintes)를 진군하여 많은 반란군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 때 리처드(Richard)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 헨리 2세와의 정면전을 피하기 위해 샤토 드 타이유부르(Château de Taillebourg)에 은신했습니다.

 

헨리 2세(Henry II)의 아들 헨리(Henry)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Philip, Count of Flanders)은 레스터 백작 로버트(Robert de Beaumont, 2nd Earl of Leicester)가 주도하는 반란에 합류하고 헨리 2세의 본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잉글랜드 상륙을 계획했습니다. 이를 예상한 헨리 2세는 500명의 병력과 부인 엘리너(Eleanor)와 아들들의 부인 및 약혼자를 포함한 핵심 포로들을 데리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나, 아들 헨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며 반란은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William I of Scotland)와 노퍽 백작 휴 비고드(Hugh Bigod, 1st Earl of Norfolk)는 헨리 2세의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힌 걸 알고, 헨리 2세(Henry II)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아들 헨리와 루이 7세(Louis VII)의 침공 계획을 다시 차단하기 위해 노르망디(Normandy) 북부 지역인 루앙(Rouen) 공성전을 벌였으나, 아들 헨리의 배신으로 인해 루이 7세는 패하게 되었고 1174년 9월 헨리 2세와 루이 7세는 전쟁을 마치고 평화 협정을 위해 몽루이 조약(Montlouis Treaty)을 체결했습니다

 

몽루이 조약 체결 당시 아들들의 권리를 회복하려 했으나, 추가 반란을 일으킬 걸 예상한 헨리 2세(Henry II)는 리처드(Richard)에 대한 권리를 회복 시키지 않았니다. 루이 7세에게 버림받고 아버지 군대와의 전투를 두려워 했던 리처드는 결국 푸아티에(Poitiers)의 헨리 2세 궁정으로 가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고, 헨리 2세는 평화의 입맞춤을 해주며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헨리 2세 초상화, 출처:wikipedia

 

이 후, 리처드(Richard)를 비롯 헨리, 조프루아 형제들 모두 아버지 헨리 2세(Henry II)에게 용서를 구했고, 형제들이 수용한 조건은 전쟁 초기에 제공 받았던 조건보다 후하지 않았습니다. 즉, 헨리 2세는 아들 리처드는 푸아투에서 두 성과 아키텐 수익 절반을, 헨리는 노르망디에서 두 성을, 조프루아(Geoffrey)는 브리타니 수익 절반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단, 엘리너(Eleanor)는 리처드가 올바르게 행동을 보장받기 위해 헨리 2세가 서거하기 전까지 포로로 남아 있어야 했었습니다.

 

반란 이후 리처드(Richard)는 아키텐(Aquitaine)에서 독자적인 통치를 강화하려 했으나 그의 통치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가혹했기 때문에 현지 귀족들과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특히 가스코뉴(Gascony) 시민들은 리처드의 강압적 통치에 크게 분노했고, 1183년, 이들은 리처드(Richard)를 몰아내기 위해 그의 형 헨리(Henry)와 조프루아(Geoffrey)와 연합해 다시 새로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헨리(Henry) 중심의 새로운 반란은 리처드(Richard)로부터 아키텐(Aquitaine) 공작령을 빼앗으려는 작전이였고, 이를 지켜본 헨리 2세(Henry II)는 제국의 분열을 우려하여 다시 대륙의 봉군을 소집하고 아들 리처드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11일, 반란군의 중심이었던 헨리 2세의 둘째 아들 헨리(Henry)는 28살 여름에 급작스럽게 병사하면서 이 봉기는 빠르게 마무리 되었고, 이는 리처드를 헨리 2세의 제국에서 사실상 왕위 계승자로  만드는 전환점이 되게 되었습니다.

헨리 2세의 아들 헨리의 대관식, 출처: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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