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 헨리 1세(Henry I of England)와 스코틀랜드 말콤 3세(King Malcom III of Scotland)의 딸 마틸다(Matilda of Scotland)와의 결혼 이야기에 이어, 헨리 1세의 정치적 주요 업적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100년, 윌리엄 2세(William II)과 죽고 새로운 잉글랜드 왕위 오르던 헨리 1세(Henry I)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며, 개혁과 평화, 안보를 강조했으며, 왕실 행정의 현대화를 통해 그는 더욱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였으며, 새로운 토지와 기회를 많은 귀족들에게 제공하였습니다. 특히 왕실 사법 제도를 크게 변화시키기도 했으나 실상은 억압에 기반한 질서를 내세우다 보니 ‘정의의 사자(Lion of Justice)’라는 별명도 가졌다고 합니다.
세금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존하는 동안 반란이 수면 위로 드러난 적은 없었으나, 교회는 여전히 왕권과 마찰을 빚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왕들은 전통적으로 자국 내 주교와 대수도원장 같은 고위 성직자를 직접 임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황청은 평신도가 하나님의 종인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끊임없이 반발했습니다. 특히 교황 파스칼 2세(Pope Paschal II)는 헨리 1세(Henry I)의 성직자 임명 개입을 문제 삼아, 서임권 논쟁(Investiture Controversy) 과정에서 그를 파문(Excommunication)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에 헨리 1세는 1107년 런던 협약(Concordat of London)을 통해 타협안을 제시하고 교황청과 합의했습니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주교와 대수도원장의 종교적 임명 의식에는 왕이 개입하지 않음
- 교회 재산과 수익 등 봉건적 권리는 국왕이 소유하고, 성직자는 임명 전에 국왕에게 봉신 서약(homage)해야 함.
이 합의는 겉으로는 교황청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왕이 교회의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을 여전히 통제할 수 있게 만든 절충안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헨리 1세는 파문 위기를 피하면서도 잉글랜드 내 교회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런던 협약 이후 헨리 1세는 교회를 후원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121년 템스 강(Thames)과 케넷 강(Kennet)이 합류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 중심지였던 잉글랜드 남부 버크셔(Berkshire) 내 레딩(Reading) 지역에 신규 수도원인 레딩 수도원(Reading Abbey)을 세웠고, 1130년에는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의 성가대 자리에 대한 석조 구조물 구축을 위한 재정 지원도 했습니다.
헨리 1세와 교회 사이의 좋은 관계는 솔즈베리 주교 로저(Roger, Bishop of Salisbury)의 존재에서도 드러납니다.
로저는 원래 노르망디의 아브랑슈(Avranches) 작은 아브랑슈 교회의 사제(Priest of the church of Avranches)였습니다. 훗날 왕이 될 헨리 1세가 그곳에서 미사를 참석했을 때,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미사를 진행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곧바로 왕의 측근으로 발탁했습니다. 헨리가 즉위 후 1101년에는 곧바로 로저를 왕실의 대법관(Chancellor)으로 임명했고, 이어서 1102년에는 솔즈베리 주교로 선출하게 됐습니다. 단, 그는 교황과의 갈등 여파로 실제로 1107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서품(consecration)되었습니다.
로저 주교는 단순한 교회 고위 성직자에 그치지 않고, 행정과 재정을 책임지는 왕국의 핵심 관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또한 잉글랜드의 재정과 세금 관리를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인 국고청(Royal Exchequer) 체계를 설계 및 구축하였고, 이후 그의 가문이 대대적으로 이를 운영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왕 다음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자 재판관장(Justiciar)같은 역할을 수행 했었으며, 헨리 1세가 노르망디에 있을 때, 로저는 잉글랜드 내에서 왕의 대리자로서 행정 및 법 집행 등을 수행하는 부왕(Viceroy) 역할을 담당하며 실질적인 내정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이 국고청이라는 이름은 재정을 관리할 때 사용한 체커보드(Checkerboard) 무늬의 천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체커보드 천 위에서 세금과 재정 상황을 계산하고 기록하는 방식이 중세 시대에 널리 쓰였고, 국고청은 1109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소집되 운영이 시작되었다고 하며, 당시 최고 책임자인 재판관장(Justiciar)이 국고청을 관리했습니다.
국고청은 왕에게 재산, 수입, 미수금 등의 재정 정보를 정리해 보고했는데, 이 미수금 내역은 ‘파이프 롤(Pipe Rolls)’이라는 장부에 각 주(Shire)별로 체계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기록들은 오늘날까지도 중세 잉글랜드 재정 운영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현대 영국 정부의 재무장관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국고청 총재(Chancellor of the Exchequer)’라는 직함을 사용하고 있고, 이는 헨리 1세 때 시작된 국고청 제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헨리 1세(Henry I) 때 설립된 국고청(Royal Exchequer)은 잉글랜드에서 관료제적 정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덕분에 왕실은 재정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헨리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왕실 토지와 면세 권한을 귀족들에게 널리 나누어 주었는데, 이런 정책은 반란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왕실의 직접적인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헨리 1세 당시 왕실 수입의 약 85%가 토지에서 나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비율은 크게 줄었습니다. 약 150년 후에는 토지 수입이 전체 수입의 40%로 감소했고, 나머지 재정은 주로 세금 징수를 통해 채워야 했습니다. 즉, 왕실이 토지를 귀족들에게 넘기면서 직접 소유한 땅에서 나오는 수입은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왕권의 경제적 힘도 점차 약해지게 된 것입니다.
헨리 1세는 모든 사람이 왕의 법 아래에 있다는 원칙, 즉 “모두가 왕의 법을 따라야 한다(All are subject to the King’s law)”는 생각을 강화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방마다 각기 다른 법이나 관습이 있어서, 왕의 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곳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헨리는 전국 어디서든 똑같은 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순회 법관(Travelling Judges)을 전국 각지에 보내 법을 집행하고 재판을 하도록 했으며, 이 판사들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왕의 법을 적용했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법의 통일성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영국의 순회 법관(Circuit judges) 제도는 바로 이 헨리 1세 시대의 순회 법관 제도에서 비롯된 전통이며, 과거는 잉글랜드 여러 지역을 돌며 왕의 법을 알리고 적용한 순회(Travelling) 방식 이라면, 현재의 순회 법관 제도는 특정 지역을 맡아 주기적으로 도는 순회(Circuit) 방식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개혁은 잉글랜드 법률 체계인 공통법(Common Law)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이후 영국뿐 아니라 여러 국가의 법체계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118년에 왕비 마틸다가 사망하자, 헨리 1세는 루뱅 백작 고드프루아 1세의 딸 아델리자 드 루앙(Adeliza de Louvain)과 1121년 결혼하며 두 번째 왕비로 맞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없었고, 헨리 1세는 1135년 12월 1일, 노르망디(Normandy) 지방의 루앙(Rouen) 남동쪽 작은 농촌 마을인 생 드니-르-페르몽(Saint-Denis-le-Ferment) 에서 지나치게 많은 칠성장어(lamprey)를 과식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헨리는 그가 직접 건립을 후원한 레딩 수도원(Reading Abbey)에 묻혔습니다.
헨리 1세(Henry I)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남성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비공식적으로는 약 21명의 서자(사생아)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마틸다의 두 아들 윌리엄 애설링(William Ætheling)과 리처드(Richard)가 있었으나, 1120년 영국 해협(English Channel)을 건너 오던 중 화이트 쉽(White Ship) 침몰 사고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 화이트 쉽 배에는 헨리 1세(Henry I)가 프랑스의 루이 6세(King Louis VI of France)와 평화 협정을 맺고, 아들 윌리엄(William)에게 노르망디(Normandy)를 공식적으로 물려주기로 약속한 뒤 잉글랜드로 동생 리처드와 함께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의 선장이 술에 취해 있었고, 배가 바르플뢰르(Barfleur) 근처 바위에 부딪히면서 배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 선원과 손님들이 목숨을 잃었고, 단 한 명만 살아남았는데, 그 사람은 노르망디 출신의 정육점 주인이었습니다.
이 비극 이후 헨리 1세에게 남은 유일한 적통 후계자는 딸 엠프러스 마틸다(Empress Matilda)였고, 헨리는 그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었습니다. 마틸다는 상당히 유력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114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엔리코 5세(Holy Roman Emperor Henry V)와 결혼하여 엠프러스(Empress, 황후)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황제가 죽고 난 후 1128년 앙주 백작(Count of Anjou) 조프루아 플랜태저넷(Geoffrey Plantagenet)과 재혼했습니다. 제프리는 그의 가문 문장에 ‘노란 금작화(Planta Genista)’ 문양을 사용해 ‘플랜태저넷(Plantagenet)’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튼, 헨리 1세가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 1세의 딸 엠프러스 마틸다가 여성이기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인물인 블루아 백작 스티븐(Stephen, Count of Blois)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었고 헨리 1세의 조카이기도 했던 스티븐은 1135년 헨리 1세 다음으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 하였으며, 이후 1154년 사망할 때까지 왕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는데, 즉위 직후부터 19년 동안 잉글랜드 왕 스티븐(King Stephen of England)과 엠프러스 마틸다(Empress Matilda)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고 내전으로 인해 노르망디의 영토는 대부분 상실되며 잉글랜드 본토 역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며, 사실상 무정부 상태(The Anarchy) 이었다고 합니다. 내전 이후 잉글랜드 왕위는 새로운 왕조인 앙주-플랜태저넷(Angevin-Plantagenet) 가문의 아들, 즉 , 엠프러스 마틸다와 앙주 백작 조프루아의 아들 헨리 플랜태저넷(Henry Plantagenet)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 받게 되며, 노르만 왕조 시대는 끝이 나고 새로운 플랜태저넷 왕조의 서막을 알리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에선 헨리 1세(Henry I)의 조카 스티븐(Stephen)이 왕위에 오르면서 헨리 1세(Henry I)의 딸 엠프러스 마틸다(Empress Matilda)와의 격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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