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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ngland

공주와의 결혼이 몰락의 시초가 된, 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 마지막 4편

by deepedit 2025.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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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왕(King John)의 사후 헨리 3세(King Henry III of England)가 왕위에 오르면서, 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의 삶은 스코틀랜의 공주 스코틀랜드의 마거릿()과의 결혼을 시작으로 서서히 몰락하게 됩니다.

 

1221년 6월,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가 헨리 3세(Henry III)의 누이 조앤(Joan)과 결혼하면서, 후버트 역시 122년 10월경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King William I of Scotland)와 왕비 에르멩가르드 드 보몽(Ermengarde de Beaumont)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스코틀랜드의 마거릿(Margaret of Scotland,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터 2세의 누이)과 혼인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 출처:Britannica

 

마거릿은 노르망디계 귀족 에이다 드 바렌(Ada de Warenne)의 손녀였습니다. 흥미롭게도 후버트의 첫 아내였던 비어트리스 드 바렌(Beatrice de Warenne)과는 사촌 관계였습니다. 이러한 인척 연결은 중세 귀족 사회에서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였으며, 후버트는 이를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고귀한 혈통과 밀접하게 연계될 수 있었습니다.

 

마거릿과의 결혼은 1221년 10월 3일 런던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신부는 헨리 3세가 직접 인도하였습니다. 당시 마거릿은 26세 이상으로 추정되며, 후버트는 50대 초반이었습니다. 나이 차이는 당시 귀족 사회에서 드물지 않은 일로, 정치적 유대와 권력의 결속이 혼인의 중심 목표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훗날 후버트의 정적들은 국왕의 허락 없이 왕실 여인과 결혼해 국왕 본인의 혼인 기회를 박탈했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27년 그는 켄트 백작(Earl of Kent)에 봉해졌으며, 이 작위는 명확히 마거릿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만 상속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의 딸 마거릿(애칭 메고타, Megotta)은 1220년대 초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략적 결혼을 통한 권력 기반 확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224년, 후버트는 헨리 3세의 여동생 엘리너(Eleanor)와 윌리엄 마셜 2세(William Marshal the Younger) 사이의 결혼을 주선하였으며, 이는 왕실과 마셜 가문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견고히 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러한 혼인 정책은 당시 귀족 간 동맹과 신뢰 구축의 핵심 수단으로, 후버트는 이를 통해 왕권과 귀족 양측 모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1225년, 불길한 소문이 권력 주변을 맴돌기 시작합니다. 존 왕의 서출 형제, 즉 헨리 2세의 사생아 윌리엄 롱스페(William Longespée, 솔즈베리 백작)가 브르타뉴 연안에서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후버트는 그의 미망인이 될 가능성이 있던 엘라 오브 솔즈베리(Ela of Salisbury)를 자신의 조카 레이문드(Reimund)와 결혼시키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엘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놀랍게도 롱스페는 실제로 생존해 귀국하였습니다. 이후 롱스페는 왕에게 후버트와 그의 일가를 고발하였으며, 1226년 3월 7일 솔즈베리(Salisbury)에서 갑작스레 사망하자, 후버트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궁정에 퍼졌습니다. 이러한 풍문은 후버트의 이미지에 치명적 타격을 입히며 정치적 기반을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윌트셔 솔즈베리 대성당에 있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스페의 형상과 방패 문양, 출처:English Mornachs

 

1227년, 헨리 3세가 실질적으로 친정을 개시하면서 후버트의 권력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1232년 마침내 그는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고, 체포 및 투옥되었습니다. 그의 몰락은 단지 개인의 패배가 아니라, 중세 잉글랜드 권력 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왕권 중심의 재편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오랜 지지자였던 윌리엄 드 바렌(William de Warenne) 역시 이 사건으로 인해 몰락에 가담하였습니다.

 

체포 직전의 후버트, 출처:lookandlearn

 

후버트의 몰락은 그의 가족에게도 큰 고통을 안겼습니다. 부인 마거릿과 딸 메고타는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Bury St Edmunds)의 수도원으로 피신했으며, 왕의 명령으로 외출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거릿은 왕 앞에서 무릎 꿇고 간청하였고, 이에 감동한 헨리 3세는 그녀에게 남편을 면회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1234년, 후버트는 공식적으로 사면을 받았고, 그에게서 몰수된 토지 또한 회복되었습니다만 이는 명예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였고, 왕정과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냉각된 상태로 남았습니다.

 

이 시기, 마거릿은 딸 메고타를 왕의 승인 없이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Richard de Clare)와 비밀리에 결혼시켰습니다. 리처드는 윌리엄 마셜의 딸 이자벨 마셜(Isabel Marshal)의 아들이자, 강력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왕의 승인 없이 진행되었고, 이는 후버트의 마지막 정치적 희망마저 꺾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메고타는 이듬해인 1237년 사망하였으며, 그와 함께 후버트와 왕실 간의 관계는 더욱 돌이킬 수 없는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1239년, 후버트와 마거릿은 결혼과 관련한 모든 사안에 대해 최종 사면을 받았으나, 그 대가로 어퍼 그웬트(Upper Gwent)와 에식스(Essex)의 해들리 성(Hadleigh Castle)를 왕실에 반납해야 했습니다.

 

✋잠깐!

헨리 3세로부터 사면받은 결혼관련 후버트와 마거릿의 사안들을 살펴보면,

첫번째, 왕실 허가 없는 결혼한 문제
 - 마거릿은 스코틀랜드 왕가 출신의 고귀한 인물로, 원래는 왕족과의 정략 결혼이 예상되는 위치였습니다. 후버트가 그녀와 혼인할 때 왕실 동의 없이 혼인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는 후에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두번째, 왕의 결혼 기회를 빼앗았다는 정치적 비난
 - 일부 귀족들은 헨리 3세 자신이 마거릿과 혼인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후버트가 이를 가로챘다는 정치적 공격을 이어갔습니다. 이 때문에 결혼 자체가 왕권을 침해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세번째, 결혼으로 획득한 토지 및 작위 문제
 - 후버트는 마거릿과의 결혼으로 얻은 영지와 권한(예: 켄트 백작 작위 등)을 불법 혹은 부당하게 얻은 것으로 비판받았고, 후에 그 일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네번째, 딸 메고타(Megotta)의 비밀 결혼 문제
 - 마거릿은 왕의 승인 없이 딸 메고타를 리처드 드 클레어(Richard de Clare)와 비밀리에 혼인시켰습니다. 이는 당시 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후버트 가문 전체에 불이익을 주는 문제로 작용되었습니다.

위 네가지 문제에 대해 사면을 받으며 동시에 후버트가 보유한 어퍼 그웬트(Upper Gwent)와 에식스(Essex)의 해들리 성(Hadleigh Castle)를 왕실에 반납하며 마무리 되었습니다.

 

헨리 3세에 반납한 후버트의 해들리 성(Hadleigh Castle), 출처:wikipedia

 

이후 후버트는 더 이상 공직에 복귀하지 않았고, 은퇴 생활을 이어가다 1243년 5월, 서리(Surrey) 지방의 밴스티드(Banstead)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Blackfriars)에 안장되었으며, 아내 마거릿도 1259년 그곳에 합장되었습니다.

 

이처럼 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는 마그나 카르타 위기와 루이 침공을 막아내며 잉글랜드 실질적 통치자로 떠올랐으나, 지나친 권력 집중과 정적들의 음모로 헨리 3세의 신임을 잃고 몰락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죄수로 전락한 그의 생애는 중세 정치의 무상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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