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왕(King John)의 사후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 왕 헨리 3세(Henry III) 시대에서의 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 이야기입니다.
후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위기 당시 존 왕(King John)의 핵심 동맹이었습니다. 그는 작은 지주 출신으로, 계급 사회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중세 잉글랜드에서 이례적으로 최고위직인 재무장관(Justiciar)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재무장관은 본래 국왕 재무와 대법 업무를 관장하는 직책이었으나, 마그나 카르타에서는 후버트가 국왕 부재 시 국정을 총괄하는 자로 명시되며, 이는 단순한 행정관을 넘어 국왕 다음 가는 실질적 권력자로 인정받았습니다.
1215년 6월, 존 왕이 러니미드(Runnymede)에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직후, 그는 교황에게 이를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반란 귀족들은 존 왕의 외조카사위이자 프랑스 왕의 아들인 루이 왕세자(Prince Louis)를 초청하여 왕위에 도전하게 했습니다. 루이는 존의 오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오귀스트(Philip II Augustus)의 아들로, 존 왕의 누이 엘리너(Eleanor)의 딸 블랑슈(Blanche)와 혼인하여 잉글랜드 왕가와도 인척 관계였습니다.
루이와 프랑스군은 1216년 5월 14일, 태넷 섬(Isle of Thanet)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들은 켄트(Kent)를 거쳐 진군하며 캔터베리(Canterbury)를 점령하고, 곧 윈체스터(Winchester)에 이르렀습니다. 그해 6월, 런던에서는 루이를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위기를 맞은 존 왕은 장남 헨리(Henry)를 윌트셔(Wiltshire)의 디바이시스 성(Devizes Castle)으로 피신시켰고, 왕권은 심각한 위협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도버 성(Dover Castle)을 수비하던 후버트 드 버그는 프랑스군과 반란 귀족의 맹공을 막아냈으며, 동시에 니콜라 드 라 헤이(Nicholaa de la Haye)가 윈저(Windsor)와 링컨(Lincoln) 성을 지키며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왕실 세력의 최후의 보루로서, 무너진 중앙 정부의 권위를 대신해 상징적이자 실질적인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1216년 10월 18일 밤, 존 왕은 뉴어크(Newark)에서 병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서출 형제인 윌리엄 롱스페(William Longespée, 솔즈베리 백작)는 루이와 함께 도버 성을 향해 항복을 요구했으나, 후버트는 단호히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루이는 존 왕의 사망 직후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흘 후인 10월 28일, 겨우 아홉 살이던 헨리 3세(Henry III)가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즉위하였고, 윌리엄 마셜(William Marshal)이 섭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후버트 드 버그는 같은 해 11월 11일 브리스톨(Bristol)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마그나 카르타의 재발급에 첫 번째로 서명하였고, 이는 그가 새 왕정의 핵심 인사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1217년 봄, 후버트는 다시 도버로 돌아가 요새를 재보급했으며, 곧이어 4월부터 재차 포위당했습니다. 그러나 5월 20일 링컨 전투(Battle of Lincoln)에서 윌리엄 마셜이 프랑스·반란 연합군을 격퇴하자 루이는 도버 포위를 해제하고 런던으로 철수하여 지원군을 기다렸습니다.
1217년 8월 24일, 드 버그는 샌드위치 해전(Battle of Sandwich)에서 직접 영국 함대를 지휘하였습니다. 이 해전에서 그는 프랑스 왕세자 루이에게 향하던 보급선들을 격파하고, 기함(flagship)을 나포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반웰 연대기(Barnwell Annalist)에서는 이 샌드위치 해전에 대해 “8월 24일, 태넷 섬 인근에서 양군이 해전을 벌였다. 수많은 프랑스 함선과 지휘자들이 나포되었으며, 나머지는 패퇴했고, 하급 병력 상당수는 전사하였다. 적군은 흩어져 재편이 불가능했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활약한 또 다른 인물은 존 왕의 서자 리처드 오브 칠럼(Richard of Chilham)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해적 유스타스 몽크(Eustace the Monk)가 지휘하던 기함에 올라 그를 생포해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루이는 잉글랜드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9월 12일 킹스턴 어폰 템스(Kingston Upon Thames)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루이는 £10,000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하였으며, 마그나 카르타는 세 번째로 재발급되었고, 동시에 숲의 헌장(Charter of the Forest)이 새롭게 공포되었습니다. 이는 왕권의 남용을 견제하고 귀족뿐 아니라 자유민의 권리까지 확장하는 중요한 진전이었습니다.
1217년 9월, 후버트는 존 왕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글로스터의 이자벨라(Isabella of Gloucester)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13일, 왕실은 잉글랜드 아홉 개 카운티의 보안관들에게 이자벨라의 땅을 후버트 드 버그에게 넘기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당시 정치 결혼이 단지 혼인 관계를 넘어서 토지와 권력 분배의 수단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결혼 후 몇 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1217년 10월 14일 이자벨라는 브리스톨 인근 케인섬 수도원(Keynsham Abbey)에서 사망하였으며,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에 안장되었습니다.
1219년, 윌리엄 마셜의 사망 이후 후버트는 윈체스터 주교 피터 데 로셰(Peter des Roches), 교황 대사 판돌프(Pandulf)와 함께 사실상의 공동 섭정 체제를 이끌며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잉글랜드 전역의 성곽, 영지, 보안관직은 여전히 존 왕 치하에서 임명된 인사들이 점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헨리 3세가 성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자신들을 해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버텼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재정을 유용하고 왕권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왕정의 회복에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1223년 말, 헨리 3세가 형식적으로 성년에 도달하자 후버트는 이들을 해임하며 왕의 친정 체제를 시도했으나, 이는 곧 10년에 가까운 정치 투쟁의 시작이 되었고, 결국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후버트 드 버그의 생애는 단순한 충신의 길이 아니라, 중세 잉글랜드 권력 구조의 복잡성과 왕권·귀족 간의 권력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사의 주요 단면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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