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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의 이복형제 '해멀린 드 와렌(Hamelin de Warenne)' 백작

by deepedit 202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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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멀린(Hamelin)은 앙주(Anjou)의 백작 조프루아(Geoffrey)의 서자였으며, 1130년경, 조프루아가 그의 아내였던 신성 로마제국 황후 마틸다(Matilda)와 별거 중일 때 태어났습니다. 해멀린의 어머니는 앙제르(Angers)의 아델라이드(Adelaide)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조프루아는 해멀린 외에도 또 다른 서녀인 엠마(Emma)를 두었으며, 엠마는 웨일스(Welsh)의 귀족 다비드 압 오웨인(Davydd ap Owain)과 결혼했습니다. 조프루아는 헨리(Henry) 1세의 딸인 마틸다의 두 번째 남편이었고, 마틸다는 훗날 헨리 2세를 낳았으니, 해멀린은 헨리 2세의 이복형제입니다.

 

해멜린 드 와렌의 문장, 출처: wikepdia

 

해멀린은 왕에게 깊은 충성을 보였고, 그 대가로 부유한 상속녀와의 결혼이라는 보상을 받았으며, 이는 동시에 그에게 영국 내에서의 지위와 영향력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해멀린과 이자벨(Isabel)은 1164년 4월에 결혼했으며, 해멀린은 결혼과 함께 ‘드 와렌(de Warenne)’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자벨의 혼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약 41파운드 10실링 8펜스(중세 후기 숙련공의 3~5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결혼 지참금으로 매우 큰 금액)에 달했습니다.

 

해멀린은 아내 이자벨을 통해 서리 백작(Earl of Surrey) 작위를 얻게 되었지만, 보통 ‘와렌 백작(Earl of Warenne)’이라는 칭호로 불렸습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를 제 5대 백작으로, 다른 자료에서는 제 4대 백작으로 지칭하는 혼란이 존재하는데, 이는 이자벨의 두 남편이 모두 같은 작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혼동을 피하려고 두 사람을 각각 4대와 5대로 나누기도 했지만, 사실 둘 다 '제 4대 백작'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1164년 10월, 헨리 2세가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을 노샘프턴 성의 회의에 소환해 비난했을 때, 해멀린은 재판에 참석해 왕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대주교를 반역자라고 비난했고, 이에 베켓은 “내가 성직자가 아닌 기사였다면 이 주먹으로 당신이 거짓말쟁이라는 걸 증명했을 것”이라고 응수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멀린이 베켓을 비난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이복형이자 헨리의 동생 윌리엄과 이자벨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아 왕실에 상처를 준 것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자벨은 해멀린의 아내였습니다. 

 

헨리 2세, 출처: wikipedia

 

그러나 베켓이 순교한 후, 해멀린은 그를 기리는 신앙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노년에 접어든 해멀린은 자신이 백내장으로 한쪽 눈이 실명되었을 때 베켓의 무덤을 덮고 있던 천을 통해 치유되었다고 신화 마냥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해멀린은 당시 영국 귀족 사회에서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을 지지했고, 헨리의 딸 요안나(Joanna) 공주가 시칠리아(Sicily)의 윌리엄 왕과 결혼하기 위해 떠날 때 호위대의 일원으로도 동행하곤 했습니다. 이 호위대는 '윌리엄 왕과 요안나가 대관식에서 함께 왕관을 쓸 때까지 귀국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헨리 2세 사후에도 그는 왕실에 가까운 인물로 남았고, 그의 조카 리처드(Richard) 1세를 지지했습니다. 해멀린은 1189년 리처드의 첫 번째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1194년 4월에는 두 번째 대관식에서는 세 자루의 검 중 하나를 들고 있었습니다. 

 

잠깐!
해멀린(Hamelin de Warenne, Earl of Surrey)이 리처드 1세(Richard I)의 두 번째 대관식(1194년)에서 세 자루의 검 중 하나를 들고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당시 왕실과 매우 가까운 고위 귀족이자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다는점을 말합니다.


중세 잉글랜드의 대관식에서는 세 자루의 의식용 검(Ceremonial swords)을 들고 왕 앞을 호위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 검들은 ‘정의의 검’, ‘자비의 검’, ‘군주의 권위의 검’ 등으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검을 들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다음 3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했다고 합니다:
  1. 왕과 혈연 또는 정치적으로 밀접한 고귀한 신분 (해멀린은 헨리 2세의 이복동생이자 리처드의 삼촌)
  2. 왕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충성 입증
  3. 영지와 작위를 통해 왕국 내 영향력이 큰 인물 (해멀린은 서리 백작으로 요크셔와 노르망디에 대규모 영지를 소유)
즉, 해멀린은 혈연, 정치적 신뢰, 그리고 귀족적 위신 모두를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에 리처드 왕의 대관식에 참여했고, 왕권의 상징을 지닌 검을 드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리처드가 십자군 전쟁에 떠나 있는 동안, 해멀린은 섭정 윌리엄 롱챔프(William Longchamp)를 지지하며 리처드의 동생 존의 음모에 맞섰습니다. 해멀린의 인장은 ‘법을 위하여, 법에 따라(pro lege, per lege)’라는 문구를 담고 있을 만큼, 그는 법과 질서를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혈육인 존(John)보다는 정의감이 앞섰음을 보여줍니다. 리처드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Leopold)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왕의 몸값을 모으고 보관할 책임을 맡은 두 명의 귀족 중 하나가 바로 해멀린이었습니다.(다른 한 명은 윌리엄 다우비니(William d'Aubigny), 애런델(Arundel) 백작이였음)

 

해멀린은 존(John) 왕 시절까지도 왕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존(John) 왕의 대관식에도 참석했고 1200년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William, King of Scots)이 링컨(Lincoln)에서 존 왕에게 충성을 서약할 때도 함께했습니다. 

 

궁정을 떠나서는 열정적인 건축가였던 해멀린은 노르망디(Normandy)의 모르트메르(Mortemer) 영지에 원형 탑성을 지었고, 이후 최신식 건축 기법을 동원해 사우스요크셔(South Yorkshire) 콘이스버러(Conisbrough) 영지에 더 크고 견고한 성을 세웠습니다. 또한 썬(Thorne)에 위치한 사냥용 별궁인 필 성(Peel Castle)도 직접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이는 콘이스버러(Conisbrouh) 성과 비슷한 디자인으로 건축됐지만 다소 작았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루이스 수도원(Lewes priory)의 수좌 수도원장 선출 문제로 클뤼니(Clunny) 수도원장 휴(Hugh)와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습니다. 휴(Hugh)는 매우 경건하고 명예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루이스 수도원장에서 1186년 레딩 수도원장으로 선출, 그리고 1199년 클뤼니 수도원장이 되었습니다. 1200년, 휴(Hugh)는 알렉산더(Alexander)를 루이스 수도원장 공석에 임명했지만, 해멀린이 임명을 거부했고, 거부의 배경으로는 수도원의 후원은 모두 자신에게 속하며, 수도원장 임명에 대한 권리 역시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거부한 것 같습니다. 

 

이후 극한 분쟁과 갈등을 본 존(John) 왕은 수도원장 자리가 공석이 될 경우 백작과 수도사들이 두 명의 후보를 지명하고 백작의 시종들이 그 중 한 명을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중재하기도 했습니다.

 

존 래클런드 왕, 출처: wikipedia

 

해멀린과 이자벨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 중 아들 윌리엄은 제 5대 서리 백작이 되어 위대한 윌리엄 마셜(the greate William Marshal)의 딸 마틸다(Matilda)와 결혼했습니다. 해멀린의 딸 엘라(Ela)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남편 로버트 드 뉴번(Robert de Newburn)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으며, 두 번째 남편은 콘이스버러(Conisbrough) 근처의 스프롯버러(Sprotborough) 출신 윌리엄 피츠윌리엄(Willam Fitzwilliam)입니다. 해멀린의 딸 이자벨(Isabel)은 로버트 드 레이시(Robert de Lascy)와 결혼했으나 1193년 그가 사망한 뒤 1196년 봄 이전에 페벤시(Pevensey)의 영주 길버트 드 레글(Gilbert de L'Aigle)과 재혼했습니다.

 

마지막 딸 마틸다(Matida 또는 Maud로 불림)는 1190년경 유 백작(Count of Eu) 헨리(Henry)와 결혼했으며, 그와 사이에서 상속 재산을 존(John) 왕으로부터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앨리스 드 루지냥(Alice de Lusignan)을 낳았습니다. 마틸다는 후에 헨리 데스투트빌(Henry d'Estouteville)이라는 노르만 귀족과 재혼했습니다. 과거에는 헨리의 사망 연도 오류 때문에 마틸다가 해멀린의 혼외 자식으로 추정되었지만, 헨리가 1190년까지 생존한 기록이 확인되어 그녀는 이자벨과 해멀린 사이의 합법적인 딸로 보고 있습니다.

 

딸들 중 한 명은 사촌이었던 존(John)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칠햄 남작(Baron Chilham) 리처드 피츠로이(Richard Fitzroy)를 1190년에 낳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해멀린은 콘이스버러 성(Conisbrough Castle) 건축에 약 10년간 심혈을 기울였고, 이 성은 가족의 주요 거처가 되었습니다. 1201년 존(John) 왕이 그를 방문도 했고, 해멀린의 아들 윌리엄(William de Warenne)이 성(Castle)의 성벽을 석재로 재건하며 성(Castle)의 완공하였습니다.

 

콘이스버러 성, 출처: wikipedia

 

해멀린은 1202년 5월경, 70대 초반의 나이에 사망 후 서식스(Sussex)의 루이스 수도원(Lewes Priory)의 회랑에 묻혔고, 아내 이자벨도 다음 해 세상을 떠나 그 옆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루이스 수도원,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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